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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8일

콜 오브 듀티가 제시하는 미래전의 문제


파올로 페데르치니 (몰레인두스트리아) | 2012년 5월 7일 | 원문보기

“미래는 검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II》의 트레일러는 이렇게 선언한다.

이 인기 일인칭 슈팅 게임의 차기작은 따로 마케팅 캠페인이 필요 없어 보인다. 게임이 정식으로 공개되자마자 게임 언론은 부지런하게 액티비전의 홍보부서처럼 활동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매체에서 앞다투어 가장 포괄적인 특징 목록을 만들고, 폴리곤이니 프레임 레이트니 말하고, 줄거리의 일부를 밝히고, 새로운 게임플레이가 진부해진 슈팅 장르에 활력을 불어넣을지 아닐지 전망하고 있다.

이런 예견된 소동 중에, 사이버테러와 로보틱스, 대 게릴라전을 언급하며 21세기 전쟁을 다룬 진지하고 잘 다듬어진 “다큐멘터리”를 홍보 자료로 보게 된 건 놀라웠다.

2010년 11월 5일

나의 60세 생일에

80년대 게임 산업의 핵심 개발자 중 한 명이었던 크리스 크로포드는 어느날 게임계가 자기가 품은 꿈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게임이 사물에만 집중하지 말고 '사람'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후 줄곧 게임 업계의 경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던 그는 90년대 중반, 결국 꿈을 위해 게임과의 작별을 선언합니다. 산 속에 살며 외부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이 마음이 맞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것의 개념을 다듬고 그 산물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는 그것이 게임을 대체하고 세상을 뒤집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길 십수년, 은둔자 혹은 비판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하던 그는 2007년에 그의 성과를 공개했습니다. 예, 아시다시피 그는 세상을 뒤집긴커녕 그 존재를 제대로 알리지조차 못 했고, 지금 게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람' 혹은 수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프로젝트를 일시적으로 중단했고 60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2010년 6월, 60세 생일 몇 주 후,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생일날 깨달았던 것을 술회한 에세이를 올렸습니다. 다음은 바로 그 에세이의 번역입니다......:)

2010년 11월 1일

PC 게임 개발자 4인이 말하는 PC 게이밍의 미래

지난 주 해외 유명 게임 블로그 코타쿠는 모든 (비디오) 게이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PC 게이밍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는 PC 주간을 보냈습니다. 추억 돋는 소재를 비롯해 다양한 관점, 다양한 주제에서 읽을만한 포스트가 많이 올라왔는데요. "디자인과 플레이 번역소"에서는 그 중에서 'PC 게이밍의 미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네 편의 칼럼을 번역해보았습니다.

이 네 편의 칼럼은 현재 PC 게임계를 대표하는 네 명의 PC 게임 개발자들이 PC 게임의 미래를 예측하며 쓴 글입니다. 세 사람은 디지털 다운로드와 소셜, 모바일을 필두로 한 작금의 변화를 반영한 듯한 견해를, 한 사람은 '근본적인 진리'를 주장했습니다.

굳이 제 말은 더 필요없을 것 같네요. 읽어보시길 :) 한 편 한 편이 짧아서 한 번에 다 올렸습니다.

2010년 7월 20일

나는 계속 플레이했다 - 게임 중독의 대가

안녕하세요, 밝은해입니다.

오늘 보여드릴 글은, 게임 블로그 코타쿠[Kotaku]의 기고편집자인 마이클 파헤이가 코타쿠에 취직하기 전 MMORPG 에버퀘스트에 중독되어 삶을 거의 망칠 뻔 했던 경험을 쓴 글입니다. 이 자전적 고백을 담은 글은 약 43만의 조회수에 공감과 찬사를 담은 800여개의 댓글로 코타쿠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앞으로 코타쿠의 글을 간간히 번역할 생각입니다. 주로 짧게 그림 위주의 글로 업데이트되는 블로그라서 가끔 업데이트 간격을 메우는 짧은 글을 가볍게 번역할 요량으로 지켜봤는데, 외면할 수 없는 질 좋은 특집기사나 컬럼도 자주 올라옵니다. 그래서 이 코타쿠의 "고전"과도 같은 컬럼을 시작으로 한두달에 한번쯤 코타쿠에 올라온 컬럼을 번역해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코타쿠와 기즈모도를 운영하고 있는 Gawker Media란 회사가 자사의 독자적인 콘텐츠 전체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로 공개해놓고 있어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번역에 관심 있는 분들은 코타쿠나 기즈모도 등에 좋은 글 올라오면 라이센스 따라 마음껏 번역해보시길 :)

2010년 1월 29일

개발팀에 게임 디자이너가 필요한 이유

폭주의 주간 피날레입니다. 오늘은 다소 흥미로운 주제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개발팀에 게임 디자이너(기획자)가 필요한 이유! 전에 국내에서 이와 관련된 주제로 논란이 있었죠? 이 글은 네덜란드 출신의 한 개발자가 1997년 게임 디자이너란 보직이 없던 시절, 회사가 게임 디자인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사내에 돌린 글입니다. 한 번 읽어볼까요?

2010년 1월 26일

바이오쇼크의 서사와 유희의 부조화 (웰 플레이드 1.0)

폭주의 주간 2일차입니다.

유비소프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이 쓴 《바이오쇼크》에 대한 비평입니다. 호킹이 글 속에서 간략히 잘 설명했듯이 그는 이 비평을 구입 여부에 도움을 주려는 리뷰와 달리, 게임을 이미 해본 사람을 위해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나누려고 쓴 것입니다. 때문에《바이오쇼크》를 플레이해본 적이 없는 분들은 글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스포일러는 없으니 주제 자체에 흥미가 있다면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이 비평은 카네기 멜론 대학의 ETC(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센터)의 출판부에서 발행한 게임비평 모음집 "웰 플레이드"(Well Played 1.0)에 수록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은 판매하기도 하지만, 그 텍스트를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수록된 비평을 주욱 살펴봐도 좋겠지요. 문서고에서는 이 책도 지속적으로 번역할 것이니, 지켜봐주세요 :)

2009년 11월 2일

게임비평 모음: 그랜드 쎄프트 오토 IV

안녕하세요, 밝은해입니다.

게임 비평을 위한 커뮤니티 블로그를 표방하는 크리티컬 디스턴스(Critical Distance)라는 블로그가 있습니다. 자체적 비평 전달보다는 여기저기 퍼져 있는 게임 비평 텍스트를 연결하고 종합하는 데 집중하는 블로그이니, 해외의 게임 철학과 사상을 전하고 싶어 하는 디자인과 플레이 문서고가 놓칠 수가 없죠!

그래서 크리티컬 디스턴스에서 읽을만한 자료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번역해나갈 생각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정 게임에 대한 비평을 수집하는 “게임비평모음”(Critical Compliation)은 특히 주목할 만 한데요. 읽어보시면 게임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깊고 다채로울 수 있음에 놀라고 즐거워하시리라 장담합니다. 그 첫 번째로, 논란과 찬사라는 양극단을 동시에 걸으며 게임 세계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게임, “그랜드 쎄프트 오토 IV”(Grand Theft Auto IV)의 게임비평모음을 번역했습니다.

글에 들어가기 앞서 한 가지 유념하실 것은, 이 글에 나타난 비평문은 모두 ‘이미 게임을 해봤다’는 전제 하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떤 게임인지 알려주는 ‘리뷰’가 아니라 게임을 해석하려는 ‘비평’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니 게임을 해보지 못 한 사람들은 스포일러에 노출되거나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번역문에 별도로 게임 속 내용에 대한 역주는 달지 않았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게 많은 게임이니 아직 안 해보셨다면 먼저 게임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즐기세요 :)

2009년 10월 15일

크로포드, “게임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잠시 환기하는 마음으로 번역해두었던 글을 하나 꺼내봅니다. 원제는 “게임 디자이너의 삶에 대한 간밤의 반추”(Late Night Ruminations on the Game Designer's Life)로, 1987년 크리스 크로포드가 쓴 글입니다. 당시 아타리가 무너지고 게임산업 전체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크로포드는 ‘프리랜서’로 활동했는데요. 거기서 오는 고독과 부담이 장난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럼에도 그는 게임 디자이너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술회합니다. 자, 소개는 이만 줄이고, 1987년 한여름 밤 고뇌하는 크로포드의 말을 들어봅시다.

2009년 10월 11일

게임 디자인의 10가지 트렌드

옙, 다시 한 번 막간(일요일)을 이용해 재탕, 미처 여기 옮겨오지 못 한 번역글 하나를 이리로 옮겨와 봅니다. 2008년 11월 18일 데이비드 맥클러라는 사람이 쓴 “게임 디자인의 10가지 트렌드”(10 Trends in Game Design)이라는 글입니다. 작년 12월즈음에 몇몇 게임 커뮤니티에 번역해 올린 적이 있었죠.

이 글은 원래 영어사이트 GameCareerGuide.com에 실렸던 글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하여 게시합니다. 트렌드의 근간을 분석하거나 꿰뚫는 글은 아니지만, 근래 게임에 나타난 다양한 경향을 개략적으로 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 볼만한 글입니다.

2009년 10월 10일

“슈퍼 콜럼바인 대학살 RPG!” 리뷰 – 제이슨 로러

이 글은 제이슨 로러가 쓴 2005년 공개된 게임 “슈퍼 콜럼바인 대학살 RPG!”(Super Columbine Massacre RPG!)의 리뷰입니다…요 며칠 업데이트가 없다가, 갑자기 왠 옛날 번역글 재탕이냐고 황당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예전 번역글을 여기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리뷰를 깜빡 빼먹고 옮기지 못 했었네요…게다가 번역에 오역이 꽤 있어서, 다시 한 번 다듬고 고쳤으니 음미하면서 다음을 기다려 주세요! (예, 스크래치웨어 선언 2장이나 게임 디자인 강의 레벨 03이요!)

이 게임은 대니 레돈(Danny Ledonne)이라는 독립영화 감독이 1999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격사건[footnote]두 학생이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총으로 살해하고, 23명을 다치게 한 사건. 범인은 현장에서 자살했다. 사건 이후 범인들이 즐겼던 록음악(마릴린 맨슨)이나 비디오게임(“둠”)이 미디어의 맹포화를 맞았다.[/footnote]을 주제로 만든 게임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파란이 일고,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또 후폭풍을 양산했습니다. 게임계 내부에서도 찬반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아래 리뷰는 제이슨 로러가 운영하는 블로그 아트하우스게임즈에 올라온 것입니다. 같은 사이트에 올라온작자 제작자 인터뷰도 번역한 게 있으니, 흥미가 가면 참고해보세요.

제이슨 로러는 자신의 글을 퍼블릭 도메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유롭게 어떤 목적으로든 복제, 개작, 전송, 배포할 수 있습니다. 번역문 역시 로러의 뜻을 따라 자유롭게 복제, 개작, 전송, 배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이 블로그로의 링크도 포함해주시면 감사해요 :)

2009년 1월 27일

크로포드, “청중 엔지니어링”

크리스 크로포드

저널 오브 컴퓨터 게임 디자인 6권(1992-1993) 수록

원제: Audience Engineering (원문보기 [영어])

2009년 1월 20일

크로포드, "취향의 진화"

저널 오브 컴퓨터 게임 디자인 4권(1990-1991) 수록

원제: The Evolution of Taste (원문보기 [영어])

 

캔디

캔디를 생각해보자. 캔디는 재미있는 음식이다. 캔디는 다른 음식과 무엇이 구분될까? 나는 그 강렬한 유쾌함이라고 생각한다. 캔디가 주는 경험이 얼마나 강렬한지 아는가? 아주 좋은 맛이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의 혀를 놀려 즐거움에 소리지르게 만들기는 한다. 그건 강렬한 경험이다. 다른 강렬한 미각적 경험인 칠리 고추를 생각해보자. 강렬하지만 유쾌하지는 않다. 칠리 고추는 웃음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캔디의 강렬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캔디는 소량을 먹어야 한다. 세끼 식사를 모두 캔디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렸을 적의 나는 캔디를 좋아했다. 그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라면서 캔디 맛에 질리기 시작했다. 좀 더 미묘하고 다양한 ‘먹는 경험’을 원했다. 십대가 되고부터 내 취향은 햄버거나 피자, 핫도그 같은 더 정교한 맛으로 성숙해졌다. 더 나이가 들면서, 미묘하고 다양함을 찾는 여정은 나를 중국 음식, 갖가지 빵, 바비큐 소스, 이탈리아 음식, 치즈, 해산물, 샐러드 등 모든 양식의 음식들로 인도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사한 과정을 거쳐왔고, 그 결과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요리의 기쁨이 가득한 미각의 거대한 우주가 탄생했다. 태국 음식, 피넛 버터, 와인, 티본 스테이크, 베어네이즈 소스, 태운 음식, 캐비어, 딜 브레드 등등. 그리고 그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캔디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재미있고, 강렬하게 유쾌한 음식이며, 소량을 취해야 하고,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카툰

이제 카툰을 보자. 카툰은 영상의 가장 재미있는 형식이다. 물론 나는 많은 형식의 영상을 즐기지만 카툰이 나를 가장 웃게 만든다. 무엇이 카툰을 그렇게 재미있게 만드는가? 나는 그것들이 강렬하게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카툰의 색상을 보라. 모두 밝고 화려하다. 부드러운 파스텔이나 섬세한 그림자는 없다. 카툰의 페이스는 어떤가.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등장인물들은 미친 듯이 질주하며 시청자들이 숨쉬는 걸 포착할 틈조차도 주지 않는다. 또 카툰 속에서는 위험에 대해 미묘한 점이 없다. 등장인물들은 날아가는 나이프나 다이너마이트 뭉치, 굉장한 높이에서의 추락 같은 맹렬한 위험에 처한다.

여기에 카툰의 유쾌한 면이 숨어있다. 등장인물들이 그런 재난 때문에 심하게 다치지 않는 것이다. 폭발 정도야 그들의 얼굴을 검게 칠할 뿐이다. 엄청난 높이에서 떨어져도 바닥에 신체 모양의 구멍이 만들어질 뿐이지 다치지는 않는다. 추락한 등장인물은 납작해지고, 스스로 바닥에서 일어나 몸을 풍선처럼 다시 부풀게 만든다. 이 끔찍한 위험과 진지함의 부재 간의 분열이야말로 카툰의 유쾌함이며, 재미다.

카툰의 강렬함은 짧아야 한다. 딱 몇 분 길이다. 이 점은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에서 실증된다. 영화는 3분 30초짜리 카툰으로 시작한다. 카툰이 영화로 변형되고 밝은 색상이 부드러워지면, 페이스는 실제 세계와 같이 늦춰지며 그 강렬함은 두 시간에 어울리도록 낮추어진다.

내가 어렸을 때, 카툰은 가장 좋아하는 영상 형식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하루 종일 카툰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라가면서 카툰의 단조로움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들이 귀엽고 작은 동물 이상이기를 고대했다.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보다 더 미묘하게 분쟁이 해결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질리언의 섬》이나 《로스트 인 스페이스》같은 더 복잡한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더욱 더 심각한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심야 뉴스나 《코넥션스》를 시청하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아웃 오브 아프리카》, 《코야니스카시》같은 영화들을 관람한다.

우리 대부분이 이와 매우 유사한 길을 걸어왔고, 그런 우리의 취향들이 합해져 영상적 즐거움의 거대한 우주가 만들어졌다. 그 우주에는 코미디, 강좌, 미스터리, 게임쇼, 연속극, 아동 프로그램 등 많은 형식의 영상이 있다. 카툰은 그 거대한 우주의 작은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 우주의 특징은, 재미있고, 강렬하게 유쾌하며, 소량만을 취하고,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코믹스

코믹스를 생각해보자. (이 논의의 목적을 위해 나는 《쥐》처럼 최근의 진지한 코믹스들은 제외하고, 주류를 이루는 코믹스만을 논할 것이다.) 코믹스는 재미있고 자극적이다. 코믹스가 재미있는 것은 강렬한 유쾌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코믹스의 그림 스타일을 보라. 두껍고 깔끔한 선에는 어떤 미묘함의 단서도 없다. 색상은 밝고 순수하다. 코믹스의 등장인물들과 대립, 사건들은 항상 강렬하다. 착한 사람들은 착하고, 나쁜 사람들은 추하고 일그러졌으며 진정으로 악하다. 착한 사람들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것이 코믹스를 재미있게 만드는 점 중 하나다.

코믹스는 언제나 소량만이 제공된다. 그 강렬함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가 크다.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항상 코믹스를 읽곤 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코믹스의 단조로움에 질리기 시작했다. 독서에 있어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미묘한 것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쥘 베른과 마크 트웨인이 쓴 더 성숙한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후에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헤밍웨이, 셰익스피어를 졸업하고, 이제 토인비, 브로델, 클라우제비츠를 읽는다.

우리 모두 유사한 진화를 추구해 코믹스에서 시작해 좀 더 미묘한 문학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들은 뉴스잡지와 과학책, 요리책, 과학 소설, 내셔널 엔콰이어러, 플레이보이, 사전, 자동차 수리 책, 경제서적, 순수문학,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싣는 저널 오브 컴퓨터 게임 디자인까지 존재하는 거대한 문학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이 우주에 코믹스라고 알려진 문학은 구석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재미있고, 강렬하게 유쾌하며, 소량만을 취하며,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한다는 점이다.

컴퓨터 게임

캔디, 카툰, 코믹스가 컴퓨터 게임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재미있다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 모두 컴퓨터 게임이 재미를 주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컴퓨터 게임은 강렬하게 유쾌한 경험이다. 컴퓨터 게임에 사용되는 비주얼을 보라. 밝은 색상들이다. 미묘한 그림자나 우아한 붓선은 컴퓨터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환영 받지 못 한다. 그 애니메이션을 생각해보라. 그 크고 밝은 폭발을.

그래픽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게임 속 대립의 본질을 보라. 플레이어는 항상 착하고, 착하며, 착한 사람으로, 나쁘고, 나쁘며, 나쁜 사람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려 한다. 그게 사악한 마법사든, 비열한 깡패든 아니면 순전히 우주 지배를 노리는 표준적인 악의 우주제국이든지 간에, 등장인물 간의 기본적인 관계는 단순하고 강렬하다.

등장인물 사이의 대립은 항상 가능한 가장 강렬한 방법, 그러니까 폭력을 통해 해결된다. 컴퓨터 게임에서 폭력은 플레이어와 디자이너에게 있어 도덕적 악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대립의 가장 강렬한 표현일 뿐이다.

이 설정으로 플레이어는 이길 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유쾌하게 강렬하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기리라는 것, 선이 악을 극복하리라는 것, 그리고 게임은 해피엔딩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컴퓨터 게임과 캔디, 코믹스, 카툰 간의 유사성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 몇 가지 다른 게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이 캔디나 카툰, 코믹스처럼 아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나이와 경험은 다르다. 내가 더 미묘한 음식을 추구했던 것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에 대해 더 많은 경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몇 톤의 설탕을 먹고 나서야 덜 강렬한 맛의 팔레트를 알게 되었다. 그처럼 수천 시간 동안 컴퓨터 게임을 플레이 하는 행위는 내 취향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도 특별한 경우다. 수백만의 어른들이 아직 컴퓨터 게임을 경험해보지도 못 했다. 그들이 새로 진입한 플레이어 층을 구성하며 높은 판매량을 유지시켜준다.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나중에 더 이상 순진한 어른 플레이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캔디, 카툰, 코믹스로 걸어온 것과 똑같은 진화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그들이 좀 더 미묘하고 좀 더 다양한 게임 경험을 추구하길 기대해야 한다. 그들이 컴퓨터 게임의 더 큰 우주로 나가길 기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플레이어들이 나아간 곳에는 뭐가 있을까? 아무 것도 없다. 텅 빈 우주를 발견한다. 우리의 플레이어는 크고 어두컴컴한 우주에 홀로 떠다니는 우주비행사다. 별도, 은하도,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의 더 성숙한 취향에 부응하는 게임들은 어디에 있을까? 시저 샐러드, 심야 뉴스, 혹은 역사 로망 소설에 비견할만한 게임들은 어디에 있을까? 크림 치즈 베이글 게임은, 아치 벙커 게임은, 재클린 수잔 게임은? 소년과 개에 대한 게임이나 황금빛 마음을 가진 창녀에 대한 게임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우리 매체의 미래가 걱정된다. 우리는 모두 이 우주의 한 모퉁이에만 움츠리고 앉아 있다. 재미라는 이름의 모퉁이,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습한 곳이다. 우리는 롤플레잉 게임이나 비행 시뮬레이터, 전쟁게임, 그래픽 어드벤처를 만드는 법은 안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다. 개척하지 않은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개간된 지역에서 모여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빈둥거리는 동안, 우리의 수용자(플레이어)들은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취향은 변한다. 그들의 새로운 취향을 만족시켜줄 우주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되면, 그들은 컴퓨터 게임을 어린이들의 오락이라 치부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컴퓨터 게임이 주는 문화적 인상은 아이들을 위한 값싼 스릴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그 뒤에서야 우리가 더 큰 우주로 나가고자 해도 우리는 대중의 기대라는 장벽에 막혀 영원히 이 재미라는 작은 모퉁이에서 나오지 못 할 것이다. 우리는 얼굴에 칠한 페인트를 지우는 게 허락되지 않은 광대가 되어버린 모습을 발견하고 영원히 엉덩방아를 찧으며 웃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의 지옥에 비하면 오늘은 천국이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그리 황량하지 않을 수도 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도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흥미를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우둔하지 않고, 우리가 기피하는 더 큰 우주로 나갈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다. 아마 그들이 신세계를 식민지화할 것이다. 상호작용성에 대한 우리의 엄청난 경험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수단이 될 것이다. 아마 스탭롤이 나가면 우리의 이름은 소도구 담당과 조명 담당 사이의 어디쯤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만은 분명하다. 취향은 진화한다. 그 진화는 어느 누구도 잡아놓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하게 앞을 향해 전진한다.

 

취향의 장기적인 진화

취향의 진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가장 좋은 예로 아서왕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문명의 밑바닥인 암흑시대에 시작되었다. 가장 초기에 구체화된 것은 캔디나 코믹스, 카툰처럼 강렬하게 유쾌했다. 테마는 단순했다. 좋은 사람 아서는 모든 종류의 나쁜 사람들을 상대하고 가장 직접적이고 편리한 수단인 폭력을 통해 대립을 해결했다. 그 전설의 초기 버전은 아서가 죽인 사람들 천지였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영국왕의 역사》와 현대 비디오게임은 그런 면에서 유사하다. 오직 다른 점이라면 전설에서는 다 썰어버리는데 게임은 다 쏴버린다는 것이다. 캔디나 카툰, 코믹스처럼 그들은 소량을 섭취하게 된다. 여행하는 이야기꾼이 전하는 전설은 하룻밤에 하나다. 이야기 전체를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12세기에 들어, 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이 그 전설을 듣고 변화를 주시 시작한다. 이야기에서 싸우는 부분(강렬함)은 줄이고 더 다양하고 미묘한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더 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났고 여성이 전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여성은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이었지만 이후에는 로맨스의 근원이 되었고, 곧 더 나아가 그들의 권리를 가진 등장인물이 되었다. 15세기에 멀로리는 전설에 낭만적인 기사도와 정신적인 요소들 조합한다. 하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싸우는 내용이 최우선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와서 아서왕 전설은 르네상스를 맞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인 명예와 의무, 로맨스가 표현되었고, 마크 트웨인은 동일한 소재를 사회적 풍자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 이 세기에 우리는 이 전설이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로맨스(《카멜롯》)에서 디즈니다운 가족적 재미(《아더왕의 전설》), 심지어는 페미니스트의 자기주장(《아발론의 여인들》)에까지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강렬한 유쾌함(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을 죽인다)이 1,200년에 걸친 확장을 통해 다양함과 미묘함으로 진화한 것이다.

 

2008년 10월 14일

크로포드, "그건 예술이 아니다"

크리스 크로포드

저널 오브 컴퓨터 게임 디자인 5호 수록 (1991년~1992년)

원문: It Ain’t Art (원문보기 [영어])

2008년 10월 11일

2007년 6월 7일

크로포드, "게임 디자이너 지망생에게..."

원로 게임 디자이너 크리스 크로포드가 게임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크리스 크로포드 | 원문보기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