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1일

크로포드, "컴퓨터 게임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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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크로포드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디자인 9호 수록 (1995-1996년)

원문보기 [영어]

 

죽음은 강렬한 단어다. 우리는 그것에서 악(惡), 망각, 결말을 연상한다. 좁은 의미로 죽음은 삶 최후의 순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목구멍이 가르랑거리고, 심장이 뛰는 것을 멈추면 우리는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죽음을 그렇게 구체적인 순간으로 한정할 수 있을까? 신장 기능이 고장 나 의학적으로 손쓸 수 없는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말기 암 환자 역시 죽을 것이다. 목을 맨 사람이나 뇌졸중을 일으킨 사람도 죽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인과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종종 흐려지곤 한다.

"삶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에라스무스의 격언 중 하나이다. 이 격언을 뒤집어볼까 한다. 희망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고. 인과적 요소들이 변화해 미래에 적응한다는 희망이 충분할 때, 우리는 그 유기체가 살아있다 말한다. 이 인과적 요소들이 우리에게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 정당한 희망을 주지 못 하면, 유기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거대한 오크 나무는 뿌리가 썩어도 몇 년을 갈 수 있지만, 수목 관리자는 나무가 죽었다고 말할 것이다. 희망이 없는 곳에, 죽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컴퓨터 게임 분야에 대한 내 예측을 논할 때 쓸 죽음의 정의이다. 그 곳에 미래에 적응하는 변화를 위한 희망이 있는가? 내 생각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컴퓨터 게임이 죽었다고 결론짓는다.

내가 '컴퓨터 게임'이라고 말하는 건 복잡한 유기체를 가리킨다. 가게 선반에 줄지어 서있는 포장된 상자들도 아니고, 수 테라바이트의 코드, 비디오, 화상, 텍스트, 소리로 압축된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컴퓨터 게임'이란 전체, 업계와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양한 하위계층으로 구성되어 각각이 전체적인 건강성에 기여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해보겠다.

살아있는 생물에게 죽음의 과정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하위체계가 집단으로 무너지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죽음은 어느 하나의 하위체계가 쇠약해진 탓이 아니라, 모든 하위체계가 집단으로 상승작용을 하며 쇠약해지는 것이다. 신장이 약해질 수록 피에 쌓이는 독이 늘어나고, 전체적인 체계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신진대사가 떨어지고 심장이 느려진다. 식욕이 감퇴하고, 따라서 손상된 세포를 복구할 영양의 공급도 줄어든다. 감염에 대한 저항이 쇠약해지고, 감염체가 기회를 잡고 폐에 발생한다. 생물이 무기력해지고 이 무기력은 사지와 근육조직으로 가는 피의 흐름을 느리게 해서 각 기능의 회복력도 떨어진다. 전신이 쇠약해진다.

나는 컴퓨터 게임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믿는다. 그 유기체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건 아니다. 대신, 거의 빈사 상태에 달했다고 본다. 컴퓨터 게임 업계는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에 적응하는 성장의 희망이 없다면, 혼수상태 속에서 그 미래가 사라질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살아있지만 모든 의미 있는 관점에서 보면 죽었다.

그 예는 아케이드 업계에서 볼 수 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아케이드가 전자 게임 디자인의 선두주자였던 걸 기억한다. 가장 촉망 받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이 아케이드 분야에서 일했다. 창조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게임들이 모두 아케이드에서부터 디자인되어 비디오게임과 컴퓨터게임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스페이스 인베이더”, “팩맨”, “센티페데”, “배틀존”, “템페스트” 같은 아케이드 고전들을 기억하는가? 광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의 아케이드를 보라. 그렇다. 업계는 아직 있다. 여전히 제품을 내놓고 돈을 번다. 하지만 창조적 광란은 어디에 있나? 초기의 그 흥분은 어디에 있나? 누가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가? 아케이드는 침체를 맞았고, 답보 상태에 있는 지지부진한 분야이다. 좋았던 옛 시절을 추억하며 현관 앞에 앉아있는 노인처럼, 아케이드는 그저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가 오면, 그 죽음은 티커 테이프 기계나 전보의 죽음과 같은 정도의 관심을 받을 것이다. 소수만이 알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비디오게임은 그 상태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죽어가는 오크 나무처럼 여전히 봄마다 새 잎이 싹튼다. 하지만 그 오크 나무처럼 이미 오래 전에 봤던 흐름만을 반복할 뿐이다. 오래 그것을 봐온 사람은 지난 세월에 비추어 새로 난 잎이 얼마나 드물고 덜 무성한지 알고 있다. 젊은 사람은 거대한 줄기와 밝은 녹색을 볼 뿐이지, 늙은이가 슬프게 고개를 젓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 한다. 비디오게임이 그렇다. 매해 새로운 게임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만, 변함없이 과거의 위대한 디자인을 서투르게 반복할 뿐이다. 마리오의 아이들은 많지만, 그에게서 상속받은 유산을 등에 업고 나태하기만 하지, 그 선조가 가졌던 활력과 추진력은 부족하다. 비디오게임은 수 년에 걸쳐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컴퓨터 게임이 죽었다. 그 죽음은 오래 전부터 기미를 보였다가 지금 여기에 왔다. 나는 분명히 보이는데 여러분은 생각만큼 그 신호를 명확하게 보지 못 하는 것 같다. 피상적으로 보면 건강해 보이는 환자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그 유기체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방법을, 분명한 죽음의 신호인 케톤성 호홉과 비대칭성 홍채를 알아채는 법을 보여주겠다.

창작자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첫 번째 신호는 창작자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의 이동이다. 컴퓨터 게임 초기에는 창작자들이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인재의 공급이 부족했다. 유능한 디자이너나 프로그래머는 귀했고, 운영진들이 디자이너의 방식에 간섭하지 못 했다. 디자이너가 떠나버리면 운영진들은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공급이 거의 수요에 가깝고,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그만큼 작품에 대한 창조적 제어권을 잃었다. 둘째, 당시에는 시장을 잘 몰랐다. 마케팅 데이터도 없이 디자이너를 압도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업계는 엄청난 양의 마케팅 자료들을 만들어 냈고 힘의 균형이 마케팅 사람들에게로 옮겨갔다.

이 권력의 이동이 나쁘다고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됐다는 거다. 마케팅 사람들이 나쁘거나 멍청하거나 우둔한 게 아니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여신에게 가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창작자 주도의 환경에서 시장 주도의 환경으로 옮겨간 것은 그 유기체에 깊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미래를 보는 생물에서 과거를 보는 생물로 변한 것이다. 창작자 주도의 접근법은 미래, 즉 어떻게 될 것인가에 집중했다. 창작자는 존재하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는 데 전력을 쏟는다. 변화를 위해서. 변화란 우리가 '생'(生)이라고 말하는 것의 핵심이다.

대조적으로, 시장 주도의 접근법은 과거를 바라보고, 성공적이었던 어제의 이유에 집중한다. 마케터는 성공의 궤적을 관측하고 그것에 집중한다. 안정성은 시장 주도 접근법에 있어 흔한 말이다.

다른 모든 산업은 창작자 주도 접근법과 시장 주도 접근법이 각자 자신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창작자들은 추진력을 공급하고, 마케터들은 지속력을 제공한다. 그 균형은 업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성숙한 산업인 세탁용 세제 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새로 개척할 세계가 필요하지 않고, 그래서 거의 시장 주도의 업계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전자 공학 같은 것은 이제 막 태동하고 있고, 그 성공은 모두 미래에 있다. 마케팅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누구든 암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 마케팅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 분야는 전적으로 창작자 주도이다.

세탁용 세제 업계를 흉보는 것도 아니고, 유전자 공학이 세탁용 세제 업계보다 전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물어보라. 어느 분야가 더 살아있다고 느껴지는가? 어느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약속하는 미래를 찾을 수 있는가?

창작자 주도의 유기체에서 시장 주도의 유기체로 옮겨가며, 우리는 컴퓨터 게임을 미디어에서 상품으로 변화시켰다. 미디어는 의사소통의 채널이고, 그 내용이 유동적이며 놀라움이 끊이지 않는다. 이 유동성, 변화는 미디어라는 생명의 심장박동과 같다. 모든 미디어에는 항상 더 밝은 미래라는 희망이 있다. 그 내용이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여 항상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은 선반 위에 놓여진 상자, 즉 죽은 것이다. 누가 오늘의 상품이 끊임없이 내일의 요구를 들어주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창작자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의 변화로 이동하며, 컴퓨터 게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한 때는 미디어로 보였던 상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 변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죽여왔다.

시장 나눠먹기

1990년, “윙 커맨더”(Wing Commander)는 컴퓨터 게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게임 자체도 강점이 있었고, 아타리를 거의 성공으로 이끌었던 1979년 아타리 고전 게임 “스타 레이더스”가 현대화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강점은 개발 예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1990년 일반적인 컴퓨터 게임 개발비용은 아마 15만 달러였을 것이다. “윙 커맨더”의 예산은 그보다 더욱 더 컸다. 오리진(Origin Systems)이 “윙 커맨더”를 내놓은 전략은 분명했다. 시장을 나눠먹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투자를 통해 시장을 키우는 일은 업계에 긍정적인 이익을 가져다 준다. 다른 모두도 그에 맞춰 경쟁해야 하고, 제품의 전반적인 질도 상승한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처럼 어린 산업에서는 그것이 성숙한 산업에서만큼 잘 먹히지 않는다. 성숙한 산업에서 투자자금을 늘리는 것은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걷어들이기 위한 시도다. 이를 위해선 빈틈없는 노련한 경영진이 필요하다. 컴퓨터 게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 모두가 지난 15년간 배웠는데도, 대부분의 컴퓨터 게임 회사 경영진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손만 더듬고 있다. 그 분명한 증거로 지난 5년간 억수 같은 돈들을 구멍에 쏟아 부은 일이 있다. 오리진의 행동은 잘못된 투자 붐을 불러일으켰고, 모두가 제품에 돈을 쏟아 부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이룩했다. 1) 고가의 쓰레기로 선반을 채워 넣었다. 2) 우리의 고객들에게 우리의 결과물이 고가의 쓰레기라고 납득시켰다. 3) 업계에 다수의 사기꾼과 기회주의자들을 영입했다.

그 투자 붐의 가장 못난 결과는 예산의 급격한 상승이다. 1980년대에는 광대 둘이서 차고에서 컴퓨터 게임을 히트시킬 수 있었다. 물론 많은 광대들이 모여들었지만, 그 중 몇몇만이 창조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컴퓨터 게임 제작 예산이 낮았기에 창조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예산의 규모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서, 컴퓨터 게임 디자인은 재력이 필요한 활동이 되었고,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나가 떨어졌다.

폐쇄적인 배급 시스템

컴퓨터 게임이 죽는 데 기여한 세 번째 요소는 자기 과신의 폐쇄적인 게임 유통 구조이다. 소매상부터 배급사와 퍼블리셔까지 유통 구조 속에 있는 모두가 무엇이 팔리고 무엇이 안 팔리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대단한 예지력으로 무엇이 히트게임을 만드는지 말해준다. 거의 과학에 근접할 정도다. 배급의 모든 과정이 빈틈없이 관리되며 수익성의 경계를 조심스레 조율하고, 그 곳에 실험을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시장의 피드백을 고려하고 그 피드백을 우리의 창작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또한 냉정해야 한다. 최고의 마케팅 데이터가 단지 진실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거기서 얻은 지식이란 이미 시도된 것의 반응에 대해서만 유용하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 시장은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물체이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겨우 조금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어떤 게임을 팔다가 실패하면 그것과 비슷한 게임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게임을 팔아 성공하게 되면 그와 비슷한 게임은 팔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일반화를 조심해야 한다. 실패는 다양한 요소에서 기인한 것이고, 어떤 게임이 왜 성공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밸런스 오브 파워”1가 왜 그만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을까? 나는 모른다. 매킨토시 인터페이스의 정신을 추구한 첫 번째 게임이기 때문에? 국제 관계에 특히 민감했던 시기에 나와서? 소년소녀들이 지배하던 당시의 업계에 지성과 성숙함을 내뿜는 게임으로 환영 받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누구든 답을 안다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왜 내가 디자인한 게임 “믿음과 배반”2이 그렇게 비참하게 실패했을까? 그래픽이 평균 이하여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픽도 당시에 잘 팔려나갔던 인포콤의 어드벤처 게임에 비하면 여전히 우위였다. 게임에 액션이나 폭력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게임이 개인간의 관계를 다루어서? 그럴지도. 목표로 하는 시장이 명확하지 않아서? 가격이 너무 높아서? 누가 알까? 여기에 위험이 있다. “믿음과 배반”도 “밸런스 오브 파워”도 우리 각자가 가진 모든 지론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개인간의 관계를 다룬 게임이 커다란 성공을 거둘 것이란 것도 그럴 듯 하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믿음과 배반”을 그 장르의 선구자로 칭할 것이고, 그 실패요인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잘 된 게임이었지만, 중대한 결점으로 [빈 칸을 채우세요]가 있었노라고.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 중대한 결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다른 실험을 해보지 않는 한 말이다. “믿음과 배반”이 실패했다고 해서 개인간 관계를 다룬 게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업계가 다른 요소에 돈을 쏟아 붓는 것으로 보아 게임계는 이미 그 결론에 다다른 것 같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다른 산업의 예를 통해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할리우드는 SF 영화가 관객을 끌어오지 못 한다는 절대 마케팅 규칙을 세웠다. 그래서 조지 루카스가 “스타 워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반대했다. 할리우드의 배급 시스템이 컴퓨터 게임 배급 시스템처럼 폐쇄적이었다면 “스타 워즈”는 절대 빛을 보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수많은 실험이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엔터테인먼트는 그 무엇보다 유동적인 영역이다. 규정화된 양식으로 실험을 지원하지 못 하는 산업은 죽은 산업이다. 컴퓨터 게임이 그렇다.

창조성의 죽음

이와 관련된 요인이자 아마 이전 요인들의 전조인 것이 창조성의 죽음이다. 내가 지금까지 16년간 이 업계에 있었는데, 대략 1990년대를 기점으로 창조성의 전반적인 수준이 크게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진정 독창적인 게임은 “심시티”다. 이 현상은 다른 게임들의 상상력 모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모두가 앞다투어 “둠” 짝퉁이나 “미스트” 짝퉁을 만들고 있다. 왜 다른 것을 베끼는 데 시간을 보내는가?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다른 근거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에는 어드벤처, 슈팅, 차량 시뮬레이션, 전략 게임 밖에 없다. 정말 그게 디자인할 것의 전부인가?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발견할 것은 다 발견했기 때문에 창조성의 기준이 떨어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갔고,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그저 1980년대에 창조성을 찾던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친 구석이나 뒷구멍이나 조사하는 것 뿐이라고.

나는 이 주장에 기가 막혔다. 그 냉소적인 모습, 어리석음, 지적 자만에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자. 인간 독창성은 인쇄의 발명으로 해방되었다. 그 기초적인 기술로 500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왔고,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계속해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인쇄는 처음에 기도서를 만들려고 쓰였지만, 이어 논쟁적인 작품들이 나왔다. 그것은 종교개혁을 뒤에서 이끈 기술이었고, 이후 과학의 공동연구를 위한 매체가 되었다. 또한 오락물이 되었고, 그것이 확장되어 19세기 대중들에게 문학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제 인쇄는 우리 문명의 근간이 되었다. 그저 종이 위에 잉크를 뿌리는 방법으로 일어난 일인데, 그에 비하면 컴퓨터의 힘은 얼마나 엄청난가!

개인용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보다 적어도 천 배 이상 그 힘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1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우리가 이 더욱 강력한 미디어의 창조적 잠재성을 완전히 탐구했고 인간 역사상 가장 빨리 변하는 미디어라는 것은 우스운 소리다. 창조적인 삶과 에너지는 우리 업계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지난 5년간의 창조적 실패는 분명한 죽음의 신호이다. 이 모든 창조적 잠재성이 우리를 필사적인 창조로의 도약으로 이끌 수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분명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죽은 공동체

업계의 죽음을 가리키는 또 다른 신호는 공동체 의식을 잃은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 게임 개발자 회의(CGDC, 역주: 지금의 게임 개발자 회의[GDC])의 정신이 변하는 것에서 분명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이 간행물의 1988년 6월호에 첫 CGDC에 대해 썼던 글이 있다. “하지만 요즘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건 공동체 의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CGDC에서) 처음 몇 시간 동안은 경외감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럴 수가. 이 사람들이 전부 나처럼 게임디자이너라니!' 몇 년 동안 홀로 작업해왔던 그 사람들은 이윽고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것에 씨름하며, 똑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95년 CGDC의 정신은 이와 대조적이다. 물론, 아주 거대하고 인상적이었지만, 무질서한 느낌이 강했다. 축하연은 화려했지만 과거의 따뜻한 공동체 정신은 없었다. 대신 소리지르고, 음식을 던지고,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때는 공동체 모임이었던 것이 흥청거리는 축제, 고깃간, 무도회장이 되었다. 가족 소풍보다는 사람 만나기 바쁜 회장처럼 느껴졌다. 그 변화의 일부는 성장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모든 문제를 성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어떤 도시는 성장의 결과로 슬럼가, 부패와 범죄가 형성되었다. 다른 도시는 이런 문제에 조우하지 않고 빠르게 성장했다. 어딘가 내 거실을 산타 클라라 컨벤션 센터로 확장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CGDC는 그 영혼을 잃었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 전반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성에 대해 말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성에 너무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본다. 무언가 정신적이고 경외해야 하며 절대적 진실과 도덕적 의무로 가득 찬 것 말이다. 나는 도덕성을 더 실용적인 용어로 본다. 사회적 단결을 위한 규칙을 모은 것이다. 도덕 체계는 우리가 협력하는 공동체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모든 공동체와 그 하위공동체는 각자의 도덕관, 각자에 특화된 다양한 도덕 체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 업계가 가진 도덕 체계는 언어가 확립되듯이 민주적으로 정착되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용하고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며, 모두의 기호의 총 평균은 공동체의 언어와 도덕률을 만든다. 도덕률와 언어는 공동체를 붙여주는 접착제와 같은 것이다. 생생한 언어와 강한 도덕률을 가진 공동체는 번영하고, 갈라진 언어나 약한 도덕률을 가진 공동체는 분열되어 사라질 것이다.

한 번은 내 재정 설계사와 복잡한 재산의 처리에 대해 논하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간단한 해결법을 제안했다. 그는 내 제안을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그는 내 제안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은 비윤리적인 사람들이 사용하는 책략과 같고 명예를 중시하는 업자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 설명했다. 분명히 합법일지라도, 그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무언의 도덕률을 어기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재정 투자를 배우면서 내 설계사가 말한 거절의 진짜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또 다른 경우가 뉴욕 출판 공동체의 회원이었던 에이전트와 사업 계약에 대해 논했을 때 있었다. 계약 중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시켰고, 나는 그 장황함에 인내심이 바닥나던 차였다. 내가 그 요청의 비효율성에 항의하자, 그는 설명해주었다. “그게 우리가 일하는 방법입니다.” 내 항의는 그가 몸담는 업계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 규칙은 그가 매일 하는 업무의 정황 속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내게 게임 공동체는 강력한 도덕률을 확립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 황금개척시대의 정신이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영혼에 침투했고 우리의 가치를 독으로 물들인 것 같다. 지난 5년, 나는 이타주의의 침식, 예술적 영감의 쇠퇴, 욕망의 은밀한 발걸음을 목격해왔다. 하지만 그 중 최악은 공동체 전반의 도덕적 무관심과 그것이 쇠퇴하는 모습에 냉소적인 태도였다.

몇 년 전 어느 큰 퍼블리셔가 직원에게 CGDC에서 기술 강좌를 하지 말라는 은밀한 압력을 주었다. 심지어 그가 강좌에서 다룰 주제는 그 퍼블리셔가 ‘관여한’ 프로젝트에 관련해 개발자 자신이 ‘직접 고안한’ 기술인데도 말이다. 그 퍼블리셔의 태도는 어떻게 봐도 비밀을 독점하려는 꼴이었다. 자기가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나는 이 사건을 통해 공개적으로 도덕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 업계는 이 따위 도덕성으로 살아갈 것인가?” 내 질문은 지적 재산권의 복잡함과 어떻게 그것의 소유권이 사업 관계를 통해 퍼질 수 있는가에 대한 자기성찰과 토론을 고무시켜야 했다. 그 대신 돌아온 것은 무감각함이었다. 누구도 내 질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CGDC가 밀러-프리먼 출판사에게 팔린 슬픈 이야기다. CGDC는 우리 업계 최초의 공동체 행사였고, 분명 공공의 봉사를 위해 역사적으로 창립되고 시행되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행사의 후임 감독들은 그들이 받은 권력으로 개인적 이익을 얻어내려는 희망을 감추지 않는다 약속해야 했다. 그들의 주식은 계약 상으로 명기되었고, 정확히 25 달러의 가치를 가졌다. CGDC 초기에는 우리가 서로 이타적이라는 데 의심이 없었다. 우리의 협력적인 문화는 우리의 결정의 근거가 되었다. 아주 건강한 도덕률이었고, CGDC에 큰 힘이 되었으며 눈부신 성공을 거둔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 초기에, 모두가 CGDC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곧 공동체의 비도덕적인 공기가 CGDC를 오염시켰다. 욕망은 언제나 집요하게 우리의 귀에 속삭인다. 신과 이 우주 앞에 고백하는데 나도 몹시 끌렸다. 나는 욕망과 함께 하며 “조금은 욕심을 내도 되지 않을까” 했다. 이타와 욕망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비도덕적인 공상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이 내 주식을 앗아가고 나를 내쫓았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CGDC를 밀러-프리먼 출판사에 공개되지 않은 가격으로 팔아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챙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엄청난 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약속을 어기며 공동체의 동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로 챙겨 넣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전 파트너에 대한 취급이었다. 그들은 전 CGDC 감독들에게 개인당 3000 달러씩 주며 법적 기권증서를 받았다. 그들이 얻은 것에 비하면 극미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놀랄만한 것은 공동체의 반응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컴퓨터 게임 공동체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냉소적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뭘 기대한 거에요, 크리스?” 비도덕에 대한 분노도, 그런 행동이 모두의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염려도 없었다. 대신, 어떤 이들은 팔아 넘긴 사람들이 부유해진 것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그 모든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고, 도덕의 단속은 개인이 아니라 법이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덕적으로 민감했던 이들은 인신공격적으로 해결을 보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을 아예 묻어버리려고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그저 충돌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묵인이었다.

CGDC를 팔았던 사람 중의 일부는 이제 CGDA(역주: 현재의 국제 게임 개발자 협회[IGDA])를 운영하고 있다. 누군가 CGDA 회원들이 그들을 가능한 빠른 시일에 교체하라 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 태어난 조직에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려면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요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팔아 넘긴 사람들 중 한 명인 어니스트 아담스는 이제 CGDA 이사 후보가 되어 봉급을 받는 위치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공동체 사람들에게 지적했을 때,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그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일을 잘 하면, 왜 과거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는 거였다.

문제는 어니스트 아담스나 CGDC를 팔아 넘긴 다른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공동체의 도덕적 능력을 시험했던 시금석일 뿐이다. 문제는 공동체에 있다. 비윤리적인 행동이라는 주장에 냉소적인 답을 하는 집단은 도덕적으로 죽은 것이다. 서로를 감시하는 개인들이 있는 곳은 보다 더 단결력 있는 공동체이다. 강력한 도덕적 기반이 없이는, 이 공동체가 분열하여 고립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잘 나가는가?

업계의 재정적 활력을 보고 내 비관적 설교를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의 부정을 지목하고 그 결과를 염려하는 비판자들은 부정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맞을지 몰라도, 여태까지 우리가 잘해온 것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벌은 받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크리스 크로포드 같은 미친 비판자들은 무시해도 될 거라고.

컴퓨터 게임 업계가 잠시 동안 그 천벌을 성공적으로 피해온 것은 분명 사실이다. 여러 면에서 이 상황은 주식 시장과 유사하다. 계속 상한가를 치니까 언젠가는 내려갈 것이라 주장하는 금융 전문가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다. 금융 보고서들은 다우지수가 중력을 무시하며,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큰 차이점은 금융에서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의 다양성을 위해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 업계는 그저 하고 있는 것을 믿을 뿐이다.

컴퓨터 게임 업계가 부상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돈이다. 선구자들이 너무 많은 돈을 벌었고, 무수한 투자자들이 업계에 돈을 쏟고 싶어했다. 왜냐면 모두 이 산업이 성장하는 걸 알고 있고, 투자자들은 오늘 돈을 잃더라도 미래에는 시장에서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돈이 업계로 쏟아져 들어왔고, 수백만 달러 짜리 제품을 만들면서 실질적인 개발비는 얼마 안 되고, 투자자들에게는 계속 “미스트”와 “둠”을 상기시켜줘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돈을 벌고 있으니,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그 수입의 대부분은 투자이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 그 돈은 마를 것이고, 우리는 초라한 신세가 될 것이다.

우리의 성공을 지속하는 또 다른 요인은 값싼 노동력의 공급이다. 다른 업계에서는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사람들의 노력에 많은 돈을 지불한다. 하지만 이 업계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일하길 원하는 젊고 열성적인 인재들이 언제나 있다. 그들의 업계에 대한 아낌없는 기여는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 노동력은 투자와 같고, 그래서 부유하고 성공적인 업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실 돌려막기로 빌린 돈으로 부자인 척 하는 사기꾼이 가득한 금융 제국과 다름없다. 어느 시점엔가, 임금은 밀리고, 금융 '제국'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 업계가 그렇다. 쉽게 들어오는 돈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순간, 기회주의자들은 그들의 투자를 거두는 데 시간을 투자하고, 값싸고 가치 있는 노동력이 있는 회사들에게 이익을 취하고, 타락을 가속화한다. 그로써 죽음의 첫 번째 과정을 가속시킨다.

우리의 가짜 성공의 세 번째 요인은 판매량 대부분이 거짓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우리가 하드웨어 제조업자들의 덕을 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개인용 컴퓨터의 가격을 낮추면서 성능은 올리는 경제적 기적을 수행하는 그들 말이다. 절대로 올라가지 않는 개인용 컴퓨터의 성능대 가격비는 대중을 유혹해왔다. 당연히 하드웨어를 살 때 게임도 몇 개 산다. 나는 처음 컴퓨터를 산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산 게임들이 지난 5년 우리 업계의 재정적 성공을 가능케 했던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

이 믿음을 뒷받침할 가장 강력한 증거는 몇몇 히트 타이틀의 극적인 판매량 증가이다. “미스트”의 커다란 성공이 타이틀 자체의 압도적인 우월성 때문이라곤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그 게임을 해봤고,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이미 컴퓨터를 가진 사람들은 “미스트”를 사려고 달려들지 않았다. “미스트”는 몇 년 동안이나 훌륭한 컴퓨터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화면이 아름다운 게임이라는 평판에 처음 컴퓨터를 사는 사람들이 새 기계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게임을 샀다.

내 가설이 맞는다면, 가정용 컴퓨터의 판매량 증가속도가 감소할 수록 컴퓨터 게임의 판매량이 크게 감소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1, 2년 안에 분명해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큰 감소를 본다면, 우리는 바보들의 낙원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즐겨온 재정적 성공은, 우리가 만드는 작품의 경제적 가치와 함께 줄어들 것이다.

영원히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지난 5년간 우리는 크게 부상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붙잡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바닥을 치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힘이 없다면, 우리는 아케이드 게임이나 비디오게임이 맞는 것과 같은 미래를 맞게 될 것이다.

다른 힘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힘이 있다. 그 힘은 컴퓨터 게임을 살릴지도 모른다. 바로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이다. 그들의 미래를 점치진 않을 것이다. 둘에 대한 칭찬은 이미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신, 나는 그 두 힘이 컴퓨터 게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야기하고 싶다.

멀티미디어부터 시작해보자. 멀티미디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게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멀티미디어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과의 차이를 분명하게 내포하고 있다. 멀티미디어가 정말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렇다, 컴퓨터 게임은 마치 멀티미디어 제품처럼 CD-ROM, 사운드 보드에 풀 모션 비디오를 사용하지만, 여전히 컴퓨터 게임은 멀티미디어와 구분된다. 이 구분은 다름을 의미하고, 다름은 멀티미디어가 컴퓨터 게임을 구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멀티미디어가 컴퓨터 게임에 대한 사회 전반의 거부 반응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모두가 컴퓨터 게임이 미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같은 수단으로 사용할 대안이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멀티미디어의 급속한 성장은 컴퓨터 게임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원한다는 광범위한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의 진보는 컴퓨터 게임의 구세주가 아니라, 맹독이다.

인터넷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것은 같은 기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아주 새로운 것이다. 인터넷이 놀라운 것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그 문화이다. 처음에는 연구 문화였고, 이후에 더 넓은 학술적 문화, 이제는 더 큰 사회의 범주로 옮겨가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 문화는 변화하고 있다. 그 정의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중에서 낙관주의자들은 눈을 빛내며 그들이 바라는 걸 인터넷에서 보고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엔가 인터넷은 어디엔가 초점을 맞출 것이고, 그게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초점이 어디일 지는 알 수는 없지만, 두 개의 극단적인 대안을 가정해보자. 인터넷 문화가 컴퓨터 게임계를 지배하는 기술광 문화를 포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극대화지만 우리의 추리를 뚜렷하게 해준다. 왜냐면 인터넷이 기술광 세계의 온라인에서의 현시로 정착한다면, 그 곳에서의 오락이란 것도 이미 존재하는 기술광 세계의 컴퓨터 게임과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컴퓨터 게임이 인터넷에 의해 변화될 수가 없을 것이다.

반면, 인터넷이 기술광보다는 주류의 민중을 위한 것이 된다면, 전통적인 컴퓨터 게임은 그것이 사회에 스며들지 못 했던 것처럼 인터넷에서도 실패하고, 컴퓨터 게이머들은 오프라인 때처럼 그들만의 공간에서만 놀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같은 결론을 얻는다. 인터넷은 컴퓨터 게임의 본질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병원으로 갈 수는 있지만, 그 결과를 바꿀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인터넷에 의한 멀티플레이를 지적하며 이것이 게임하기의 양상을 바꿀 혁명적인 사회화 요소가 될 거라 주장한다. 지금까지 게임은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사교적이지 못 한 게임광들을 끌어들이고 사회적인 사람은 쫓아냈다. 그들은 인터넷이 그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유형의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이고 새로운 창조적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말이다.

이 주장에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뒤로 잠시 물러서서 인터넷의 사용에 관한 커다란 문화적 논점들을 살펴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게임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 참여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인터넷은 문화를 발전시키고 이 지배적인 문화는 상업적으로 가능한 스타일의 게임을 보여줄 것이다. 말하자면, 좋은 멀티플레이어 게임으로 많은 수의 '보통' 사람들이 '기술광' 문화에 참여하려고 모여들지 않을 것이란 거다. 만약 내 이전의 주장처럼 인터넷이 '보통' 사람들을 위한 매체가 된다면, 컴퓨터 게임과는 차이를 둔 멀티플레이어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멀티미디어가 그 자체를 컴퓨터 게임과 구분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의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차이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기술이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기술을 바꾼다. 컴퓨터 게임이 목표 시장을 확립하는 데는 거의 10년이 걸렸지만, 그 시장은 이제 거의 깔끔하게 정립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고객과 컴퓨터 게임의 모습을 말해준다. 새로운 기술이 고객의 바탕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스스로를 대중 시장 매체로 확립하는 데 실패했다. 대신, 취미 영역이 되었고, 취미는 편협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 게임이 바닥으로 추락할 거라는 게 아니다. 기차 모형, 아마추어 사진, 목세공처럼 똑같이 계속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는 눈 앞의 이익을 얻으려다가 횃불을 떨어트렸고, 밝은 미래가 함께 하는 살아있는 매체를 만들어낼 기회를 잃었다. 대신, 우리는 취미를 만들어냈다. 물론, 괜찮은 취미다. 하지만 우리가 80년대 초에 낙관적으로 꿈꾸었던 잠재성에는 접근하지 못 한다.

나로 치면, 글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횃불을 집어 재를 털고, 이제는 외로운 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뗄 것이다. 그 흥겨운 행진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일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서있는 사람은 많다. 모두 잠재적인 계몽가들이고, 각자 이 상황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것이 멀티미디어 사람에게서 올지, 인터넷 사람에게서 올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향에서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창조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기술의 탐험보다는 대중 매체를 구성해야 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은 안다.

나는 이 일에 낙관적이고 즐겁게 임할 것이다. 작년과 재작년을 통해, 나는 전통적인 컴퓨터 게임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고,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 찬 재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그들은 거기에 있고,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

주석
1. 역주: “밸런스 오브 파워”(1985, Balance of Power). 크리스 크로포드가 디자인한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미국이나 소련의 지도자가 되어 가능한 실질적인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국가의 권력과 위상을 높여야 한다 [돌아가기]
2. 역주: <믿음과 배반: 시붓의 유산>(1987, Trust & Betrayal: The Legacy of Siboot). 크리스 크로포드가 디자인한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목사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일곱 명의 복사 중 한 명이 된다. 그 경쟁은 폭력이 아니라 마음을 읽는 심리의 싸움이었다.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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