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5일

제이슨 로러, 조나단 블로우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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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게임 《브레이드》를 제작한 조나단 블로우의 2007년 인터뷰입니다. 인터뷰어는 제이슨 로러에요. 당시에는 게임이 제작중이었지만, 로러는 리뷰용 빌드를 통해 이미 게임을 해본 상태였습니다.

이 인터뷰는 문서고의 어떤 글보다 제작과정에서의 고민을 세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브레이드》가 어떻게 그런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의 취향과 지적 호기심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에는 인디게임과 게임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합니다.

 
제이슨 로러
2007년 2월 20일
원문보기 [영어]
 
조나단 블로우(Jonathan Blow)는 제작중인 시간 조작 게임 《브레이드》(Braid)의 프로그래머이자 디자이너이다. 아직 대중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브레이드》는 이미 여러 페스티벌에 출품되고 한 메이저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바 있다. 조나단은 1995년부터 게임 업계에서 일해왔다. 그의 주류 업계에서의 작업은 《둠 2》(Doom 2)의 포팅과 《오드월드》(Oddworld)와 《데이어스 엑스》(Deus Ex), 《씨프》(Thief) 프랜차이즈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것이 있다. 그러던 중, 그는 또 한 회사를 공동 창립해 온라인 SF 액션/전략게임 《울프람》(Wulfram)[footnote]역주: 현재 공식 웹사이트 링크는 깨져 있다.[/footnote]을 제작했다. 이 게임은 아직까지도 플레이어가 있다. 2002년에 조나단은 게임 개발자 회의(Game Developer Conference, GDC)에서 익스페리멘탈 게임플레이 워크샵(Experimental Gameplay Workshop)[footnote]역주: 조나단 블로우를 비롯 더그 처치(Doug Church), 크리스 헤커(Chris Hecker), 로빈 허니키(Robin Hunicke)가 조직하여 매년 GDC에서 열리는 워크샵. 워크샵 전에 메이저와 인디를 가리지 않고 참가작을 모집한다. 콘텐츠에서의 참신함보다는 새로운 게임플레이의 실험을 장려하고 발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footnote]을 시작했고, 그 이래로 매년 운영해오고 있다.

다음 인터뷰는 2007년 1월 9일에 이메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제이슨 로러: 《브레이드》를 만들게 된 전말을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처음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요?

조나단 블로우: 초기에 《브레이드》에 영향을 미친 건 분명이 기억하는데, 《오라클 빌리어즈》(Oracle Billiards)라는 게임 프로토타입이었습니다. [윈도용 데모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오라클 빌리어즈》의 아이디어는 어느 날 영화 《매트릭스 리로디드》(Matrix Reloaded)를 보았을 때 떠올랐어요. 물론 영화는 끔찍했지만, 그 중에 제 생각을 촉발시킨 것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매트릭스》 첫 편에서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오라클이라는 인물이었어요. 첫 편은 그녀에 대해 흥미로운 의문점들을 세워놓은 것 같았죠. 하지만 2편은 그걸 완전히 망쳤어요. 정말 성질났었죠.

주인공들이 분투하는 것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더 근본적으로 흥미롭게 보였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게임에서 탐구해볼까 생각했고, 곧 제법 빨리 《오라클 빌리어즈》에 담긴 디자인을 만들어 냈죠. 일반적인 당구 게임이에요. 큐 볼을 쳐서 다른 공을 맞추면, 굴러갔다가 멈추는 거죠. 그런 게임이 다 그렇듯 공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물리 시뮬레이터가 있었죠. 어떻게 속도가 줄어들고, 벽이나 서로에 대해 어떻게 튕겨지는지에 대한 거요. 모두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배우는 기본적인 수학으로 만들 수 있는 모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게, 수학은 결정론적이라는 겁니다. 공의 특정한 시작 상태(위치, 속도, 크기, 마찰 계수)가 주어지면, 미래 어느 시점에든 공이 어디에 있을지에는 정확히 하나의 답만 있어요. 노골적으로 무작위적인 요소를 넣지 않는 한 말이죠. 어떤 당구게임은 그런 무작위적인 요소를 넣기도 하지만, 저는 이 디자인에선 배제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특정한 샷 방향과 힘에 대해서, 공이 어떻게 움직이다 멈출 것인지는 정확히 하나의 미래만 있죠. 《오라클 빌리어즈》의 전제는 샷을 날리기 전에 그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이걸 한 적이 없었어요. 이게 색다른 아이디어기도 하지만, 많은 CPU 파워가 필요했죠. 볼이 어딜 향할 것인지 보여주려면 매 프레임마다 60분의 1초 정도에 30초 정도의 물리 연산을 모두 돌려야 해요.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가 빨라서 안 될 거 없죠.)

공을 치기 전에 샷의 결과를 볼 수 있는 능력은 게임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겨냥하는 게임을 전략게임으로 바꾸어 놓았죠. 겨냥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공을 어디에 두고 싶은지 전략적으로 결정해야 해요. 자기 공은 최대한 많이 빠트리면서, 상대는 적게 빠트리고, 상대는 제대로 된 샷을 하기 어려운 위치를 받도록 해야 하죠. 제가 전문 당구선수는 아니지만, 이건 전문 선수들이 게임을 하는 방식 같았죠. 선수들은 샷을 하는 데는 능해서, 정말로 앞을 구상하고 샷을 어떻게 가져갈지 결정하죠. 그래서 이 게임은 의식을 확대하는 기본적인 성질에 더해, 소수의 엘리트 선수들의 경기는 어떨까에 대해 약간이나마 맛보는 것 같아요. 그게 흥미롭죠.

이건 작은 프로토타입이었고 진지한 개발 단계까지 가진 않았어요. 공을 넣고 이길 수 있게 포켓을 추가하지도 않았죠. 이유는 이래요. 그 게임으로 제가 하고자 한 것을 이루긴 했어도, 그걸 플레이하는 느낌은 제가 구상한 게 아니었거든요. 흥미로운 전략게임이 되길 바랬지만, 그리 흥미롭진 않았어요.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엔 공의 물리적 상호작용이 너무 무질서했거든요. 각도의 작은 차이가 각각의 충돌에서는 굉장히 확대되어 버렸어요. 그래서 노리는 각도를 조금만 바꿔도 공이 끝나는 위치가 너무 빠르게 변하는 거에요. 공간을 살피고 어떤 정보에 근거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처음 시도했던 것이 아주 느리고 정확하게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키를 추가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다지 도움이 안 됐어요. 결국 저는 본래 이런 종류의 게임에 있어서 당구의 물리 현상은 무질서한 것이라 판단했어요. (그리고 또 이 무질서는 게임이 전문가의 플레이 같은 것과는 가깝지 않다는 걸 증명해줬어요. 진짜로 선수들이 판을 어떻게 보고 어떤 가능성을 다른 가능성에서 분리하는지 밝혀내고 포착하지 못 했죠. 인지과학에 있어서는 정말 흥미로운 탐구대상일 거에요.)

전략 부분이 되진 않았어도, 그 게임에는 제가 예기치 못 했던 흥미로운 부작용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공이 굴러가는 걸 본다고 하죠. 두 개의 공이 서로를 향해 굴러갑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서로 충돌할건지 아직 확신은 못 하죠. 하지만 공이 멈출 지점이 구르는 경로에서 벗어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반드시 충돌한다는 것도 압니다. 머릿 속에서 충돌을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죠. 그런데 꼭 공이 가게 될 지점을 곧대로 상상하진 않죠. 하지만 충돌은 일어나고, 딱 그 곳에 멈춥니다. 꽤 초현실적인 느낌이죠.

그래서 저는 동일한 게임 아이디어를 덜 무질서한 설정 속에서 추구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설정으로 떠오른 것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 같은 2D 플랫포머입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을 하면 버섯이든 너구리 꼬리든 뭐든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죠. 근본적으로 아주 단순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이 걷고 점프하며, 몬스터의 머리를 밟고 튀어오릅니다. 그 단순한 상황이 제겐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을 탐구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틀[template]으로 보였어요. (왜냐면 틀 자체가 너무 복잡하면, (a) 그 위에 정교한 것을 구축하려고 복잡한 문제에 뛰어들어야 하고, (b) 실험하고자 하는 것의 기본적인 성질을 분명히 관찰할 수가 없어요. 그 틀이 플레이의 느낌을 크게 좌우해버리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때부터 저는 미래를 본다던가 하는 기묘한 소재를 포함하는 2D 플랫포머를 만들기로 마음 먹었어요. 당장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그 게임 디자인이 정확히 어떨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았거든요. (가령, 턴 기반이 아닌 연속적인 시간으로 흐르는 플랫포머에서, 어떻게 멈춰서 미래를 보고 그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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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디자이너 메일링 리스트에 몇 개 가입해 있는데, 얼마 안 있어 한 메일링 리스트에서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Prince of Persia: Sands of Time)와 《블링스: 더 타임 스위퍼》(Blink: The Time Sweeper)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요. 두 게임 모두 플레이어에게 VCR로 영화를 되감듯 사건을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주죠. 논의했던 것 중 일부가 두 게임 모두 되감기가 속임수로 사용된다는 거였죠. 그 능력이 파워업 같은 걸 모으는 데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죠. 자기 고집이 있는 제 친구 케이시 무라토리(Casey Muratori)는 모두 제한 없이 되감을 수 있는 능력을 줘야 한다고 했죠. 사실 많은 게임이 이미 그걸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죠. 어디서든 세이브하고 세이브 포인트에서 리로드. 단지 인터페이스가 훨씬 더 불편한 거죠.

이건 논쟁의 여지가 있었어요. 플레이어가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되돌릴 수 있다면, 귀결의 중요성과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이 주장에 대해서는 모두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죠. 실제로 아무도 제한 없는 되감기를 구현하지 않았어요. 되돌아 보면 좀 의아했죠. (그런데 그리 의아하지도 않아요. 메일링 리스트 사람들이 대부분 바빠서.)

어느 시점엔가 이게 제 2D 플랫포머 아이디어와 합쳐 졌어요. 월드에서 월드로 이동할 수 있는 게임인데, 월드마다 시간의 작동방식이 서로 다른 겁니다. 한 월드에서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래를 볼 수 있고, 다른 월드에서는 이미 한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것 등등.

이건 앨런 라이트맨(Alan Lightman)의 책 《아인슈타인의 꿈》(Einstein's Dreams)을 상기시켰고, 시간이 작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죠. 제가 기술을 다룬 배경이 있어서, 첫 번째 월드는 플랫포머의 기본적인 규칙을 따르면서 시간이 특별하게 움직이지 않는, "특별한 규칙 없는" 월드여야 하는 것처럼 보였요. (물론, 최종 게임에서는 모두 바뀌었지만, 이게 원래 구상이었죠.)

결국 이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먼저 가장 명확한 아이디어 같아 보이는 되감기부터 시작했어요. 《블링스》는 해본 적이 없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는 짜증났어요. 게임 디자인은 강했지만, 되감기 능력이 약하게 만들었죠.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해주는) 모래가 바닥 나면 죽을 수가 있어서요. 보통 게임과 다를 것 없이 세이브하고 불러오는 불편한 문제를 똑같이 겪어야 하는데다가, 짜증나는 인터페이스 때문에 제대로 되지도 않는 복잡한 모래 문제까지 가지게 된 거죠. (시간을 되돌리면 게임이 느려지고 조작이 어려워 모래를 낭비하기 쉬웠어요.) 비디오로 보면 멋져 보여서 게임을 파는 데는 강점이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게 아니었어요.

《페르시아의 왕자》의 디자이너들이 다른 방법으로 게임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점프해서 떨어져도 플레이어를 벌하거나 죽이지 않는 플랫폼 게임을 만드는 거나, 도전과 인과를 줄이는 법 같은 거요. 그들은 몰랐기 때문에 문제에 부딪힌 거죠. 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거나요. 플랫포머에 대한 그 사람들의 선입견이 너무 강해서 되감기가 꽃을 피울 수 없었던 겁니다.[footnote]역주: 조나단 블로우는 이 인터뷰 원문에 댓글을 달아 인터뷰가 《페르시아의 왕자》에 대해 너무 비판적으로 보이는 것을 사과하며, 《페르시아의 왕자》가 없었다면 《브레이드》를 만들지 못 했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왔을 것이라 감사를 표했다. 이 비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판 《페르시아의 왕자》는 "점프해서 떨어져도 플레이어를 벌하거나 죽이지" 않고, "도전과 인과를 줄인" 모습을 보인다.[/footnote]

제가 '되감기 월드'를 작업하며 세운 주 목표가 이것들을 모두 올바르게 해내는 거였죠. 되감는 능력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얼마나 멀리 되돌릴 수 있는가 하는 면에서, 완전히 무제한이어야 했어요. 그게 월드의 모든 것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칩니다. (《페르시아의 왕자》와 달리 사운드와 애니메이션, 음악도 모두 거꾸로 재생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게 그 월드에서 게임플레이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죠. 되감기가 근본적인 것이었고, 그 목표는 게임 디자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탐구하는 거였습니다.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이 능력을 주어주면서 흥미로운 게임을 만들까요? 저는 비디오게임의 관습 중에서 되감기와 충돌하는 게 있다면 모조리 다 갖다 버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훌륭하게 작동했습니다. 결국에는 되감기 자체가 게임 전반에 근간을 둘 수 있는 강력한 게임 메커닉이란 걸 보여줬죠. 모든 월드가 고유의 것에 더해서 되감기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서로 다른 작동방식이 되감기를 대체하기보다는 그것과 상호작용하게 된 거죠. 그리고 디자인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게임이 되기까지 시간의 작동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패러다임을 시험해 보고 버리고, 추가했어요.

플레이어가 월드를 나아갈 수록 단락 별로 나타나는 텍스트 기반의 스토리를 넣었는데요. 왜 스토리를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기로 한 건가요?

원래는 스토리가 모두 한꺼번에 도입부 화면에 나타나도록 했었고(게임플레이 없이 텍스트만), 스페이스바를 누르면 게임플레이로 진입하도록 했었어요. 그건 플레이어를 게임에서 멀어지게 하는, 나쁜 것이었죠.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화면에 많은 글자를 읽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그냥 넘겨버리죠. 스토리 텍스트만 나타나는 화면이 뜨면, 그냥 넘겨버리고, 넌 내가 원하지 않는 걸 하고 있잖아 하고 게임과 다투는 느낌이에요. 안 좋았어요.

어떤 레벨을 플레이할지 선택하는 화면에 스토리를 넣으면 그 기분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단어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을 수는 있지만, 쓸데 없이 존재하는 화면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게 하죠. 또 그건 제가 스토리를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게 만들었고, 그건 휴대용 플랫폼으로 포팅할 경우에 작은 화면에서도 읽을 만한 것이 되죠.

스토리는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요?

앞서 언급했던 《아인슈타인의 꿈》이에요. 그 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책에 담긴 아이디어는 좋다고 생각해요. 단지 필체나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꿈》은 분명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에 대한 오마쥬에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제가 대학 때 읽어야 했던 책인데 제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에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정신적 공간의 은유로서의 물리적 공간'과 '삶의 성취에 대한 은유', '모종의 그리움' 처럼 제가 《브레이드》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할 때 같은 식으로 느꼈던 주제들을 많이 담고 있어요. 《브레이드》의 스토리는 거기서 비롯되었어요. 그런데 게임은 소설과 달리 스토리가 나오는 방식이 다르니까, 《보이지 않는 도시들》처럼 나타나지는 않아요. 목표가 그저 글을 쓰는 거였다면 칼비노가 썼던 것과 비슷하겠지만, 그걸 게임에 구겨넣는 게 그리 대단한 목표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또 스토리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데이빗 린치(David Lynch)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Mullholland Dr.)에요. 인터넷에서 이 영화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스토리를 풀어냈고 하나의 명확하고 옳은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분명 그 해석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렇게 확신하는 건 스스로를 우롱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해석과 대립하는 측면을 무시하는 거죠. 저는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어떤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스토리를 의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것들이 때로는 흥미롭고 기묘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간 같은 거라고 봐요. 그 영화는 공간의 1차원적인 평면적 투사가 아니라, 그 풍부한 공간에 대한 관객의 시각과 소통하는 겁니다. 또한 관객의 마음이 함축과 가능성의 망을 탐험하여 일종의 미스테리를 풀도록 하는데, 그 미스테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3차원 공간에 1차원의 시간에서 해법을 찾기에는 너무도 깊은 것이에요.

많이들 보았을 다음과 같은 역설 같은 겁니다.
아래 문장은 진실이다.
위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을 하나의 연속된 시간 속에서 읽고 해결하려면 못 합니다. 두 문장은 서로에게 모순되니, 막혀버리기 쉽죠. 이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계속 달릴 수도 있지만, 달릴 곳이 그리 많지 않아 금새 막힌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하지만 이걸 프로그래머나 논리학자로서 접근한다면, 1차원적인 순서로 보는 대신, 상자와 화살표가 서로를 가리키는 다이어그램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여전히 같은 역설이지만, 진실을 구하려다 막히기 보다는, 뒤로 물러서서 그 구조를 관찰하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시점으로 보면 그 구조에는 역설이 없다는 걸 보게 됩니다. 단순한 겁니다. 보고 싶은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거죠.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저 다이어그램과 비슷한데, 더 많은 차원에 많은 상자와 화살표가 있죠.

스토리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게임플레이에 대한 제 비전과 잘 맞는 듯 보였어요. 시간이 모순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월드가 있고, 이미 많이 있는 시간 조작에 대한 고전적인 아이디어(대체되는/모순되는 현실, 과거를 여행하며 자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의 역설 등)를 이용할 수 있었죠.

어떤 사람들은 비디오게임의 예술 형식으로서의 정점을 19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의 "황금기"라 불렸던 시대로 못 박는데요. 그 때를 보면, 1인 개발자나 아주 작은 팀이 매우 참신한 게임들(도나 베일리(Dona Bailey)의 《센티페드》(Centipede)와 이와타니 토루(岩谷 徹)의 《팩맨》(Pac-Man)이 떠오르네요)을 만들어 냈죠. 오늘날 업계의 거대한 개발팀에서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고품질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면에서 아마 이점이 있을까요? 1인 개발자나 작은 팀이 예술적인 면에서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대규모 게임들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깊은 예술적 표현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 가능한 겁니다. 예를 들어, 《완다와 거상》(ワンダと巨像)이 다분히 예술적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더군요.

문제의 일부는 게임 개발 과정에 너무 많은 혼돈이 있는 겁니다. 큰 예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예술적인 영화도 있긴 한데, 게임은 영화보다 만들기가 더 어려워요. 그저 뭐라도 완성시키는 것마저 너무 어려운데, 예술적 의도를 가지고 한다는 건 더 많은 일이 필요하고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죠. 많은 팀에게 그건 게임을 사상의 지평선[footnote]역주: 블랙홀에서 블랙홀의 중력에 대한 탈출속도(중력의 끌어 당기는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커지는 구역을 말한다. 이 사상의 지평선을 넘어서면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즉, 이 맥락에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과 유사한 비유인데, 이런 과학적 개념을 통한 비유에서 블로우의 성향을 잘 볼 수 있다.[/footnote] 너머로 보내버리는 일이죠. 만드는 게 불가능하게 된다는 겁니다.

작은 팀과 1인 개발자들의 경우는, 큰 팀에 비해 예술적 표현에서 이점을 가지고 있죠. 그들은 자기들이 그저 원하는 걸 할 수 있습니다. 큰 팀을 가지고 갈 때 생기는 타협이나 기업의 구조에 붙들리는 일 없이요. 더구나 제가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 게임 만드는 게 훨씬 더 쉬워졌습니다. 지금은 진입장벽이 어느 때보다도 낮고, 인터넷을 통해 게임을 배급하고 팔 수도 있죠.

그런데, 많은 인디들은 예술적인 게임을 만들려 하지 않아요. 그냥 게임을 만드는 거죠. 그게 그들이 가진 야망의 한계입니다. 때문에 많은 인디들이 큰 회사가 되고 싶은 것처럼 행동하죠(캐주얼 게임의 복제품을 만들거나, 전통적인 장르 게임을 만들거나). 인디 개발자가 가진 분명한 힘, 그러니까 큰 회사들에 대한 경쟁우위는 돈을 잃는 힘, 돈을 잃어도 괜찮다는 힘입니다. 대체로 큰 게임 회사들은 돈을 잃을 수가 없죠. 잃는 순간 가능성이 통제되고, 심지어 하루하루 개발자의 사고 패턴까지 통제됩니다. 인디 개발자들은 그런 문제가 별로 없죠, 특히 따로 직업을 가지고 남는 시간에 게임을 만드는 1인 개발자의 경우엔 더욱 그래요. 들인 시간에 금전적으로 돌아오는 게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점이 청중의 규모를 걱정하지 않고 대단한 것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일 테죠.

예술에 대해 한 문장으로 당신의 정의를 말해줄 수 있나요? 말하자면, 엔터테인먼트 작품과 예술 작품을 어떻게 구별짓나요?

지금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이 있어요. 제가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우리가 예술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할 거라고 하고 싶군요. 어떤 사람들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모든 것" 같은 정의를 쓰기도 해요. 그걸로 만족한다면야, 괜찮죠. 하지만 제가 볼 땐 너무 광범위해 보여요. 제가 하고 있는 것의 목적으로 볼 때, 예술이란, 예술가가 중요하거나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청중과 깊은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길 바라는 표현이에요.

어떤 전자게임이 예술적 성취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평할 수 있는 게임이 없네요. 사람들이 게임 형식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활용했는가 하는 면에서, 아직 거기까지 가진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픽이나 스토리에 있어 예술적인 것을 이룬 게임은 많이 있죠. 하지만 저는 게임이 게임플레이를 통해 그 메시지를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니면 영화를 만들거나 책을 쓰는 작가죠. 그렇게 많은 게임이 게임플레이를 통해 정교하게 표현하지는 못 했습니다.

익스페리멘탈 게임플레이 세션(Experimental Gameplay Sessions)에서는, 로드 험블(Rod Humble)의 《결혼》(The Marriage)을 보여주고 싶네요. 그 게임은 복잡한 주제를 100% 게임플레이를 통해 표현해요. 그 게임에 의해 전달되는 이해는 글이나 사진으로 받을 수 있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험블의 게임은 그 게임 고유의 방법으로 청중과 소통하죠. 대부분의 게임 권위자들이 게임플레이가 가진 소통의 힘이라고 평해왔던 것과도 다릅니다. 《결혼》은 아주 단순한 게임이지만, 장래가 기대되는 시작이라 생각합니다.[footnote]역주: 《결혼》의 제작자인 로드 험블은 EA의 심즈 부서 수석 프로듀서이다. 아마 앞서 "청중의 규모를 걱정하지 않고 대단한 것"을 만드는 "따로 직업을 가지고 남는 시간에 게임을 만드는 1인 개발자"는 그를 가리키고 하는 말인 듯 하다. 그의 게임은 매우 추상적인 양상을 띄고 있고, 관습적이지 않으면서 게임 내에 따로 부연설명이 없기 때문에 난해한 면이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게임플레이 자체를 순수하게 느끼면 좋을 듯 하다. 그의 홈페이지에서 《결혼》과 다른 게임인 《하프 문 베이 너머의 별들》(Stars over Half Moon Bay)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footnote] 저는 디자이너들이 그 게임을 플레이하고서, 영감을 받아 그 토대 위에서 뭔가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함께 보기: 아트 오브 브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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