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마다 찾아오는 밸런스 오브 파워의 제작과정입니다. 오늘로 2장이 끝나고, 다음 주에는 쿠데타를 다룬 3장이 시작됩니다.
※ 제가 정치/역사 전문가가 아니니, 잘못된 용어나 표현 발견하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다. 20세기 이전의 반란
우리는 보통 반란이라고 하면 소비에트에서 지원받은 AK-47 소총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현대적인 문제로 본다. 반란은 정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기록된 역사에 나타난 가장 첫 사례는 이집트에 대항한 가장 커다란 폭동이었던 메기도 전투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록된 역사의 가장 마지막 전투에 붙을 이름을 상기시킨다. 아마게돈.) 정부가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그 정부를 싫어할 것이고 그에 대항해 무력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정부의 특정 집단에 대한 대우에 대한 불만)는 변하지 않았더라도, 표현의 초점은 어떻게든 변해왔다. 고대의 반군은 거의 부족의 문제였다.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제국 같은 강력한 정부는 제국에 통합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반란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분노를 삭이며 기다리는 동안 그 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고대의 반란은 대부분 노골적인 분리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에서 평소에 싫어하던 제국의 세금 징수원을 죽이게 되고, 주민들은 문을 닫고 피할 수 없는 응징을 기다린다. 몇 개월 뒤 제국의 군대가 문 앞에 당도한다. 때로는 황제가 관대하거나 주민들이 겁에 질려서, 지도자를 처형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선에서 평화롭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포위공격이 이어지고 결국에는 씁쓸한 결말로 마무리 된다. 마을사람들이 제국의 군대를 무찌르게 되든, 도시가 습격당하고 주민들이 학살되어 자루에 담기거나 노예가 되든 말이다. 앗시리아의 왕 앗수르나시팔 2세는 반란을 일으킨 한 도시를 어떻게 다뤘는지 잘 기록하고 있다.
내가 쿳무키의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내게 말했다. "비트할루프의 수루 시에 반란이 일어나, 그들의 통치자인 하마타이를 베고, 비트아디니에서 온 그들이 스스로를 왕이라 하며 누구의 아들도 아니라 합니다." 아다드와 나의 위대한 왕국을 만들어 주신 위대한 신들의 도움으로, 나는 내 전차와 군대를 결집하여 하부르 강 기슭으로 진군했다. 비트할루프의 수루 시에 당도하자 그들은 나의 주이신 앗수르의 영광에서 비롯된 공포에 압도당했다. 도시의 장로이자 가장 늙은 자들이 저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내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히아바바를 포로로 잡았다. 마음에 용맹함을 담고 내 무기에 서린 분노와 함께 하여 도시를 덮쳤다. 반군들을 붙잡았다. 나는 아주리우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반란을 일으킨 장로들은 모두 가죽을 벗겼고, 반란에 함께 한 관리들은 사지를 잘랐다. 아히아바바는 니네베로 데려가 가죽을 벗겼고, 그 가죽은 니네베의 벽에 뿌렸다.
(D.D. 루큰빌,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고대 로마 기록>)
반란이 가진 문제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동일함을 나타내는 흥미로운 예 중 하나가 13세기에 영국인들이 웨일즈를 복종시키려 했던 이야기다. 웨일즈인은 영국 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반쯤은 폭동상태나 다름 없었다. 영국이 웨일즈를 진정시키려고 썼던 전략은 미국이 베트남에게 썼던 기술보다 700년이나 앞섰던 것이었다. 그들은 성을 쌓았는데, 이건 미국이 베트남에서 썼던 "전략촌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곳에 정부군이 주둔하는 것이다. 영국은 주민들에게 성 주변에 있는 마을에 정착하도록 장려(혹은 강제)함으로써, 웨일즈 사람들의 상당수를 정부의 지배하에 놓을 수 있었다. 반군은 스스로를 점점 더 깊고 깊은 야생 속으로 몰아가면서, 주민들과 차단되었다. 결국 반군은 쇠하다가 죽게 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도 피로 물든 폭동을 가져왔다. 이 전쟁은 비록 종교적인 성질이 먼저 눈에 띄기는 해도,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신교와 카톨릭 군의 사회적 구성은 분명 이 전쟁이 종교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성격을 띄고 있음을 나타낸다. 초기에 나타난 대립은 대부분 종교로 위장한 천민들의 반란이었다.
후스파의 반란 역시 전형적이었다. 15세기 초의 보헤미아는 독일인들로부터 침입을 받아 많은 보헤미안 거주자들이 쫓겨난 상황이었다. 침략자에 대해 끓어오르던 분노는 보헤미아의 이단자였던 요한 후스가 교회에 의해 화형당하자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후스파라 칭하며 애꾸눈의 노기사 얀 지슈카의 지도 아래 군대를 조직했다. 지슈카는 마차를 총으로 무장하여 역사상 최초의 탱크를 만들기도 했다. 20년 동안 후스파는 그들을 상대하려고 찾아온 군대들과 싸우며 독일인과 가톨릭을 학살했고, 그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반란은 결국 동족 살해와 무정부에 따른 혼란으로 붕괴되었고, 지칠 대로 지친 민중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가져다 준 법과 질서의 복귀를 환영했다.
라. 미국의 반란 (1765~83)
미국의 독립 혁명 역시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 군사적 환경에서 비롯된 예외를 제외하면 성공한 반란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랐다. 반란은 1760년대 미국 이주민들이 모국에 대해 환멸을 느껴갈 무렵 시작되었다. 특히 1765년의 인지 조례[Stamp Act]는 광범위한 폭력 저항을 유발시켰다. 게임 <밸런스 오브 파워>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저항은 테러리즘이었다. 그 이전에는 폭력보다는 대체로 차(茶)나 소유권 같은 영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측면을 보였다. 1760년대 말을 거쳐 압력이 높아지고, 1770년대에 들어 왕권에 대한 도전은 더욱 대담해졌다. 그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권위를 지키고자 더욱 강하게 탄압하는 것 뿐이었다. 테러리즘이 게릴라 전으로 변한 것은 1775년 벙커 힐에서였다.
독립 전쟁은 게릴라 전 국면과 내전 국면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머스켓 총의 정확도가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약 50야드(약 45미터)를 넘어서면 머스켓으로 조준 사격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머스켓을 가지고 싸우는 방법은 딱 두가지 뿐이었다. 1번, 위험을 감수하고 50야드 안에서 조준 사격을 하고 싸운다. 2번, 몇십발이라도 맞길 바라며 수백 정의 머스켓을 마구 발포한다. 유럽의 전통적인 전술은 후자를 강조했고, 영국은 전쟁 내내 그 방식으로 싸웠다. 식민지 미국이 직면했던 문제는 소수의 병사만이 효과적인 게릴라 전에 필요한 사격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식민지 미국의 전술은 전통적인 서서 싸우는 전투와 요즘의 게릴라가 사용하는 숨어 다니기 전술로 나뉘었다. 전통적인 전술의 사용이 잘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재빨리 지정학적 이득을 볼 기회를 포착해 미국의 반군에게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 지원은 군사적 개입으로까지 발전했고, 사실상 프랑스 해군의 참전이 미국이 요크타운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스페인 정부 역시 지원을 제공했었다.
1778년 들어 전쟁은 미국 식민지가 우위를 차지했다. 전쟁은 내전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결국 3년 후 영국은 요크타운에서 마지막 항복을 선언했다.
마. 반란 수상식
만약 내가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반란에 상을 준다면, 내 수상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장 피를 많이 본 반란상:
북부 독일 프로테스탄트 그룹이 카톨릭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한 반란인 30년전쟁(1618-48)과 중국내전(1934-49)이 공동수상한다. 각각 3천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가장 긴 반란상:
바스크 분리주의자의 반란. 바스크인은 카르타고와 로마, 서 고트, 아랍, 스페인과 싸워오면서 오직 암흑시대의 몇백 년 동안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지금 그들이 포기했다고 (혹은 이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혼잡스러운 반란상:
러시아 내전 (1918-22). 원 정부는 쿠데타로 전복되고, 새로 들어선 정부가 6개월 뒤 또 다른 쿠데타로 전복되고, 그렇게 들어선 새로운 (붉은)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이 전개되었다. 붉은 군대(공산주의자)와 하얀 군대(왕정주의자와 공화주의자)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자 경쟁했다. 또 폴란드, 체코,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코사크, 시베리아 등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국수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 영국, 미국, 일본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개입했다. 전쟁은 그들이 흘린 피에 빠져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사상자를 냈다. 붉은 군대의 승리도 그리 압도적이거나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무익한 반란상:
이 상은 하도 경쟁자가 많아서 결정이 힘들었다. 70년에 일어난 유대독립전쟁이 조직되지도 않은 소수의 사람들로 힘이 정점에 달한 로마 제국에 도전한 완전히 무익했던 반란으로 꼽혔다. 잔혹한 사실은 그 로마에 대한 반란아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숫자 상의 열세를 알면서 상황을 나쁘게 만들 일은 없다. 하지만 유대인의 국가와 종교에 대한 극단적인 감성은 사람들을 분노에 찬 저항으로 밀어넣었다. 그 결과 추정컨데 백만 정도의 인구가 전투에서 죽었고,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최고의 무대연출상:
카스트로의 쿠바 반란. 군사적 현실은 이랬다. 카스트로의 게릴라는 눈을 피해 외진 산악지대에 숨어서 지냈고, 가능하면 전투를 피했으나 전투에 말려들 경우 대체로 패배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스스로의 무절제함에서 붕괴되었다. 정권이 붕괴되자, 카스트로는 산에서 내려와 그 스스로를 "영웅적인 사투"의 승리자로 포장했다. 200명이 죽자 3만명의 쿠바군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고 하면 거기서 벌어진 전투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조연상:
미국이 승산없는 싸움에서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해준 것. 이처럼 완벽하게 주연 배우 자리를 빼앗은 조연은 없다.
최고의 특수효과:
다시. 미국이 베트남에서 스마트 폭탄과 네이팜,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독창적인 장비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것.
최고의 다윗과 골리앗 장면:
뇌샤텔 사건. 1865년에 뇌샤텔 시의 공화주의자들이 프로이센의 도시에 대한 영주권을 거부했다. 프로이센은 당시 유럽에서 거대 권력이었다. 프로이센이라는 코끼리가 뇌샤텔이라는 파리를 쉽게 밟아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프랑스와 영국이 반란군의 편을 들고 지배권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최고의 반란 관련 인물들:
최고의 영예는 16세기 모스크바에 대항한 코사크 반란의 불운한 지도자 스텐카 라진에게 주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잡혀가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페루의 피에 굶주린 센데로 루미노소도 언급해야 겠다. "빛나는 길"이란 뜻을 가진 그들의 이름에 흔하디 흔한 "민중", "해방", "전선" 같은 단어를 이름에 넣지 않은 용기를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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