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스토리를 말하는 매체일까요? 아니면 게임에 있어 스토리가 완벽하게 결합하는 건 그저 환상에 불과할까요? 오늘 소개할 게임 디자이너 그렉 코스티키안(Greg Costikyan)의 글은 거의 스토리에 가까운 것부터, 게임에 가까운 것까지 스펙트럼을 살펴보며 그 동안 게임과 스토리를 결합하려 한 시도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게임은 스토리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의 역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습니다. 그 쪽의 글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습니다. 오늘은 스토리와 게임을 결합하려고 했던 역사를 살펴보지요. 이 글이 발표된 게 2007년 말이니, 오늘날에는 또 어떤지 생각하며 읽어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
그렉 코스티키안
2007년 12월 28일
원제: Games, Storytelling, and Breaking the String (원문보기 [영어])
라이센스: CC BY-NC-SA 2.5
1973년 이전에, “게임은 스토리텔링 매체다” 같은 말을 했다면, 누구든 미친 사람인가 쳐다보거나, 게임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1973년 이전에,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네 가지 양식의 게임이 있었다. 고전 보드 게임과 고전 카드 게임, 상업용 보드 게임, 보드 전쟁게임. 이 중 어느 것도 스토리와 눈에 띄는 접점이 없었다. 체스에도, 브릿지에도, "모노폴리"[Monopoly]에도, "아프리카 콥스"[Afrika Korps]에도 스토리는 없다.
하지만 1970년대 초, 두 게임이 나타난다. 바로 윌리엄 크라우서(William Crowther)의 컴퓨터 어드벤처 게임인 "콜로살 케이브"[Colossal Cave][footnote]원작 콜로살 케이브의 발매일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윌리엄 크라우서는 1975년이라며 “1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참고자료 이후의 링크를 참고하라.)[/footnote]와 개리 가이객스[Gary Gygax]와 데이브 아네슨[Dave Arneson]의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 "던전 앤 드래곤즈"[Dungeons and Dragons][footnote]첫 상용판은 실제로 1974년 1월에 출판되었지만, 1973년 말 선발매된 부수들이 유통되고 있었다.[/footnote]다.
돈 우즈의 "어드벤처"
"콜로살 케이브"와 그 가장 세련된 형태인 돈 우즈[Don Woods] 제작의 "어드벤처"[Adventure]는 그 처음부터 ‘인터랙티브 픽션’[Interactive Fiction]으로 간주되었다. 이 용어는 오늘날에도 텍스트 어드벤처(더 이상 상업용 매체는 아니다) 제작자들이 사용한다. 내가 처음 "어드벤처"를 접했을 때(1970년대 중반 보스콘 사이언스 픽션 컨벤션에 MIT 컴퓨터 클럽 멤버들이 설치한 소형컴퓨터에서), "어드벤처"는 ‘인터랙티브 픽션’이라는 디렉토리에 담겨 있었고, 나는 그 이름 때문에 그걸 실행했다. ‘인터랙티브 픽션’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지만, 흥미가 갔다. 곧 게임을 그럴 듯하게 부르는 새로운 명칭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학생들이 날 쫓아낼 때까지 몇 시간을 플레이 했다.
사실, 텍스트 어드벤처는 게임으로서도 픽션으로서도 큰 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이고’ 픽션의 미학적 즐거움도 다수 ‘제공한다’.
이젠 취미로 만드는 사람들이나 디지털 예술가들만 텍스트 어드벤처를 창작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통되는 장르인 그래픽 어드벤처(예: "그림 판당고"[Grim Fandango])와 액션/어드벤처(예: "싸이코너츠"[Psychonauts])를 낳았다.
"던전 앤 드래곤즈"는 원래 데이브 아네슨이 만들었고 개리 가이객스가 다듬었는데, 미니어처 피규어로 판타지 전투를 플레이하는 "체인메일"[Chainmail] 규칙의 파생물이었다. "체인메일"은 개인이 군대 전체와 같은 힘을 지닌 특별한 ‘영웅’ 캐릭터를 위한 규칙이었다. 아네슨은 그 규칙을 정교하게 만들고, 전장이 아니라 몬스터로 들끓는 지하의 ‘던전’으로 게임의 배경을 바꿨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게임의 단순한 확장이었지만, 완전히 참신한 형태의 게임이기도 했다.
플레이어는 한 명의 캐릭터를 플레이하며 시간이 지나면 능력을 키우고 힘을 얻는다. (초기의) "던전 앤 드래곤즈"는 규칙 모음으로, 줄거리의 복잡성이나 진정한 롤플레잉 등 진짜 스토리텔링과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 번의 플레이 세션을 통해 캐릭터가 상상 속 세계를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이 게임플레이와 스토리 사이의 접점을 더 가깝게 할 기회를 제공했다. D&D는 미니어처나 보드, 카드 같은 물리적 게임 자산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혁신적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상상에서 나왔다. 이전의 게임이 지녔던 제약을 근본부터 뒤바꾼 것이다. 상상할 수 있고, 게임마스터에게 그럴 의지가 있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이는 더욱 유연하고 자유로운 형식을 지닌 게임의 지평을 열었다.
테이블탑 롤플레잉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고 혁신적인 상용 장르이고, 컴퓨터/콘솔 롤플레잉, MMO, LARP(라이브 액션 롤플레잉 게임), 심원한 ‘인디’ RPG 운동(‘포지’[The Forge]에서 논의 중이다)을 포함해 거의 모든 장르의 게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게임과 스토리의 충돌
스토리가 중요할 수도 있지만 게임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이들과 스토리가 필수라고 보는 사람들의 문화 충돌은 거의 “스토리가 있는 게임”의 발단부터 있어 왔다. 1977년, 보드 전쟁게임과 테이블탑 RPG 등의 열성팬을 노리는 비(非)디지털 게임의 출판사 그룹인 게임 제조업자 협회[Game Manufacturer’s Association, GAMA]는 공식적으로 산업의 이름을 “어드벤처 게임 산업”(이후에 텍스트/그래픽 어드벤처 팬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으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GAMA의 몇몇 멤버들로부터 공모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중에는 전쟁게임 출판이 주 사업이었던 회사도 있었다. 그들은 “제3의 제국”[Third Reich]이나 “워털루의 나폴레옹”[Napoleon at Waterloo]이 “어드벤처 게임”으로 부르기 힘들다는 것을 살피지 않았다. 메이저 전쟁게임 출판사 SPI의 예술 감독 레드몬드 시몬센[Redmond Simonsen][footnote]우연치 않게, “게임 디자이너”라는 용어를 창시한 사람이다.[/footnote]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이 제안은 확실하게 좌절되었다.
게임을 형식적 시스템으로 보는 이들과 스토리텔링 매체로 보는 이들 간의 충돌은 디지털 게임의 발생에도 지속되었다. 게임 개발자 회의[Game Developer Conference, GDC]의 프로그램에 참석해보면, 게임에서 스토리의 역할에 대해 논하는 패널이나 프리젠테이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되는 관점의 지지자들도 분명히 파악해볼 수 있다. 크리스 크로포드[Chris Crawford][footnote]역설적으로, 크로포드는 돈키호테처럼 그의 관점에 있어 진정한 인터랙티브 픽션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게임”과는 다르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footnote]와 댄 번튼[Dan Bunten]은 “시스템으로서의 게임” 쪽이고, 할 바우드[Hal Barwood]와 마크 바렛[Mark Barrett]은 “스토리로서의 게임” 쪽이다.
그리고 물론 오늘날에도 게임학계에서 “루돌로지스트”[놀이론자, ludologist]와 “내러티비스트”[서사론자, narrativist]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논의는 개발자들이 수십년간 해왔던 주장의 요점을 되풀이하고 있다(Wardrip-Fruin and Harrigan 2004).
왜 이런 논쟁이 있는 걸까? 왜 계속 되는 걸까?
스토리는 선형적이다. 스토리의 사건은 몇 번을 읽어도(혹은 보든, 듣든) 동일한 순서에 따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스토리는 제어되는 경험이다. 저자는 사건을 세심하게 선택해 배치하는 등, 최대의 효과를 주려고 의식적으로 공을 들여 스토리를 제작한다. 만약 사건이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면 스토리의 효과는 감소할 것이고, 그게 아니면 저자가 잘못한 것이다.
게임은 비선형[nonlinear]이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최소한 자유의지의 환상이라도 제공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자신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다고 느껴야 한다. 완전한 자유는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 속에서의 자유다. 구조는 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지만, 플레이어가 선택권이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순전히 경험의 수동적인 수취인이 된다. 만약 사건이 선형의 경로로 한정되어 있고, 그 순서를 바꿀 수 없다면, 게임 내내 전철을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플레이어가 하는 것이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면, 그건 의미 있는 차원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스토리의 요구와 게임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대립이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 경로에 분기가 생긴다면 덜 만족스러운 스토리를 만들 것이고, 플레이어의 행동에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덜 만족스러운 게임을 만들 것이다. 게임을 좀 더 스토리 같은 것(제어되고, 저자가 원하는 대로 사건이 일어나는 미리 정해진 경험)으로 만든다면 덜 효과적인 게임을 만든다. 스토리를 좀 더 게임 같은 것(경로와 결과의 대안 제시)으로 만든다면 덜 효과적인 스토리를 만든다. 단순히 게임이 스토리가 아니라거나, 그 반대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둘이 상반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난 2000년 게임 디벨로퍼[Game Developer]지에서 내가 했던 주장은 그렇다(Costikyan 2000). 하지만 분명 스토리와 게임플레이를 성공적으로 조합해 넓은 청중에게 강하게 호소한 게임 양식은 수 없이 많다. 그 문제를 더 세련되게 본다면 이럴 것이다. 게임에서 좋은 스토리를 끌어내려면, 플레이를 통해 스토리를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게임플레이를 제한해야 한다. 스토리의 요구와 게임플레이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대립이 있다. 게임의 스토리 측면을 강화하는 제약이 게임 측면을 덜 흥미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게임은 제약의 시스템이다. 플레이어는 그 제약 속에서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항상 행동에 제한이 따르고, 그 제한 때문에 적확한 게임플레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체스(전적으로 스토리가 결핍된 게임이며,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컷씬을 넣는다고 해서 더 좋아지지 않는 게임)의 경우를 보자. 만약, 체스에서 모든 말을 어느 방향으로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별로 흥미로운 게임이 아닐 것이다. 각 말의 움직임이 특정한 패턴으로 크게 제한되어 있어 나타나는 부대간의 복잡한 상호 영향이 체스를 매력적인 게임으로 만든다.[footnote]
벤 언더우드의 해설:
코스티키얀의 논지는 플레이와 서사의 구분에 의존하는 스토리를 추가해서는 향상되지 않는 게임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에 굳이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월터 벤 마이클즈[Walter Benn Michaels]는 “The Shape of the Signifier”에서 게임은 플레이어의 주관적 입장이나 믿음에 의지하지 않는다 주장했다. “체스를 예로 들면, 하얀 말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검은 말을 플레이하는 사람을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 간의 대립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이기느냐이다. 그 게임에서 중요한 건 무엇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느 편에 있느냐이다”(32). 하지만 마이클스의 주장은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주관적 입장이 (적어도 일부는) 게임의 목표이고 게임 자체가 플레이어의 믿음으로 구성된 롤플레잉 게임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움이 있다.
[/footnote] 말하자면, 이 게임은 제약의 시스템이고. 스토리가 게임에서 나타나게 하려면 그렇게 되도록 제약해야하므로, 스토리도 만들어 내고 흥미로운 게임플레이도 불러 일으키는 제약 모음의 구성이 연역적으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개념적으로는 가능하다.
스토리를 수반하는 거의 모든 게임(혹은 게임의 속성을 수반하는 스토리)은 극히 선형적이면서 자잘한 게임플레이가 있는 것부터 꽤 열린 방식이지만 스토리가 부속물인 것까지 하나의 축으로 볼 수 있다. 이제 그 스펙트럼을 한 번 들여다 보고, 대안이 될 수도 있는 최근 게임들을 살펴보자.
꼬르따사르의 "팔방놀이"
훌리오 꼬르따사르[Julio Cortázar]의 1966년작 "팔방놀이"[La Rayuela](영어로는 ‘Hopscotch’로 출판)(Cortázar 1987)는 일반적인 소설과 동일한 방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꼬르따사르는 작품의 시작에 앞서 색다른 읽기방법을 제시한다. 각각의 챕터를 그가 제시하는 다른 순서로 읽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 방식대로 읽으면 등장인물의 동기와 이야기의 전개에 대해 보통 순서대로 읽었을 때와 다른 감상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두 방식 모두로 읽어봐야 한다.
말하자면, 이것을 스토리와 게임의 최소한의 혼합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의 가지를 가진 가지치기 서사인 것이다.
물론, 교묘한 솜씨고 흥미롭다. 하지만 "팔방놀이" 같은 소설이 하나의 장르로 나타날 것이라 상상하긴 어렵다. 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스토리보다는 게임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긴 해도, 여전히 우리가 게임이라 부르는 것과는 한참 먼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소설
"팔방놀이"를 두고, 하이퍼텍스트 소설로 가보자. 브라운대학의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가 제시한 하이퍼텍스트 소설은(Coover 1992), 아마 마이클 조이스[Michael Joyce]의 "오후: 어떤 이야기"[afternoon: a story]가 최고의 예일 것이다(Joyce 1990).
이것은 웹의 예인데 반해, 하이퍼픽션 운동은 웹을 앞선 것이다. 대부분의 하이퍼픽션은 이스트게이트[Eastgate]의 스토리스페이스[Storyspace] 엔진 같은 독점 시스템에서 구현되었다. 먼저 다수의 링크가 있는 글 한 구절로 (아마 관련된 이미지와 함께) 시작한다. 링크를 하나 선택하면 다른 구절이 나타난다. 즉, 각 마디 별로 다수의 경로가 있어 웹과 같은 서사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웹을 돌아다니는 것도 선택한 링크를 순서대로 따라가 구절에 도달한다는 면에서는 “선형”이다. 하지만 보통의 전통적인 서사와 달리, 선형으로 이어지는 단일 서사선을 유지할 수 없다. 대신, 최고의 하이퍼텍스트 소설은 궁극적으로 서사 트리를 충분히 탐험해 일종의 통찰[epiphany]에 도달하게 한다.
이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전통적인 서사에 비하면 만족할만한 스토리를 만들기 더 어려울 것이고, 게임플레이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게 아니다. 교환 같은 것도 없고, 다른 링크를 두고 어떤 링크를 선택할 이유도 없고, 추구할 목표도 없다. 게임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들을 빼놓고 있고, 무엇보다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게임북
Choose Your Own Adventure
게임북(Choose Your Own Adventure이나 Which Way 시리즈 같은 책)은 이언 리빙스턴[Ian Livingston]과 스티브 잭슨[Steve Jackson][footnote]영국인 스티브 잭슨이다. 텍사스 출신 스티브 잭슨과 혼동하지 말자.[/footnote]의 "파이팅 판타지"[Fighting Fantasy] 게임북이 국제적인 베스트셀러였던 1980년대 후반에 가장 인기가 있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소설과 꽤 흡사하다. 텍스트 구절을 읽고 나면, 선택(여자냐 호랑이냐)을 하게 되고, 그 선택의 결과를 묘사하는 다른 구절을 책에서 찾아 읽는다. 어떤 게임북에서는 그게 전부다. 하지만 ("파이팅 판타지" 같은 책을 포함해) 다른 책에는 전투나 다른 액션을 다룰 기초적인 게임 시스템이 있다. 그 텍스트로 이런저런 몬스터와의 전투를 풀어나가, 승리하면 X 페이지로, 실패하면 Y 페이지로 가도록 한다.
이건 분명 더 게임스럽다. 목표가 있고(최소한 하나의 긍정적인 엔딩이 있다), 최소한 기초적인 시스템이 있으면 결과가 임의적이지 않다. 물론 문제가 있다. 플레이어에게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 대부분이 스토리에 만족스럽지 못 한 결과로 이어지고(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죽는다), 다시 플레이할 가치도 매우 적다.
결국, 어떤 면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소설과 거의 동일하다. 하이퍼텍스트가 문학자들의 영역이라면, 게임북은 저급한 매문[賣文]으로 볼 수 있다.
단락 시스템 보드 게임과 일인용 RPG 어드벤처
단락 시스템 보드 게임[paragraph-system board game][footnote]역주:구글 검색을 해보니 paragraph-system board game이라고 칭하는 곳은 거의 없었고, paragraph-based board game으로 칭하고 있었습니다.[/footnote]과 솔로 RPG 어드벤처[solo RPG adventure]는 게임북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취해 더 깊고 만족스러운 게임플레이를 시도한다. 솔로 RPG 어드벤처는 근본적으로는 게임북과 같은 구조지만, 어드벤처 책자와 독립된 풍부한 테이블톱 RPG 시스템에 따라 더 다양한 결과를 낼 수 있다.
단락 시스템 보드 게임(에릭 골드버그[Eric Goldberg]의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Tales of the Arabian Nights]가 가장 좋은 예다)에서는, 플레이어가 말판에서 말을 움직이고, 때때로 동봉된 책 속에서 글자 단락을 찾게 된다. 이 단락은 게임 시스템을 통해 중개로 일종의 선택을 제시하여, 플레이어를 짤막한 게임북 같은 시나리오로 이끈다. 책 속에는 그런 시나리오가 많이 있고, 한 세션의 플레이에는 그 중 소량만이 사용된다. 그것은 어떤 순서로든 이루어질 수 있어서, 게임을 제법 다시 플레이할만 하게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스토리에서 게임으로 축을 더 옮긴 것이다.
"드래곤스 레어"
드래곤스 레어
게임북과 닮은 꼴의 테이블톱이 있듯이, 아케이드 게임에도 그런 것이 있다. 1984년 "드래곤스 레어"[Dragon's Lair]가 소개되었을 때, 아케이드에서 큰 히트를 쳤다. 당시 아케이드 게임의 그래픽은 상대적으로 원시적이었고, "드래곤스 레어"는 돈 블루스[Don Bluth]가 만든 영화 품질의 애니메이션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놀라운 시각적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게임으로 치자면, 형편 없었다. 플레이어는 몇 초간 애니메이션 클립을 본 다음에, 재빠르게 조이스틱을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선택을 내려야 했다. 어떤 선택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른 선택은 또 다른 몇 초의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져 다시 선택을 한다. 끊임 없이 다시 플레이하며 기계적인 암기과정을 통해 어떤 선택을 하면 죽지 않을까를 학습한다. 놀랄 것도 없이, 후속작은 실패했다.
어드벤처 게임
어떤 면에서 텍스트와 그래픽 어드벤처도 게임북과 비슷하다. 텍스트 구절을 읽거나 게임세계의 한 지역을 보고, 다른 구절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선택을 내린다. 하지만 노골적인 가지치기 서사는 아니다. 플레이어는 종종 이전에 방문했던 영역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인벤토리 시스템과 퍼즐이 게임플레이를 제공한다. 하지만 서사는 여전히 선형이다. 어드벤처 게임은 "실로 꿴 구슬"[beads-on-a-string] 같은 경향이 있다. 작은 영역에서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다소간 행동의 자유가 있고, 어느 지점에서 다음 구슬로 이동하는 길이 열린다. 구슬 속에서는 다소의 자유가 있으면서, 전반적인 게임은 구슬을 통하는 선형의 진행이다.
원칙적으로, "실로 꿴 구슬" 모델을 따르지 않는 유형의 게임을 구현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하기는 어렵다. 콘텐츠 개발은 비싸고,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며 그 중 일부만에 노출된다면 개발비를 낭비하게 된다. 가지가 늘어날 수록, 한 명의 플레이어가 보게 될 것은 적어진다.
본질적으로, 어드벤처 게임은 게임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게임을 진행할 수록 새로운 영역을 열고 새로운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디지털이기 때문에 더 상호작용할 수 있다.
루카스 아츠의 "그림 판당고"
그래픽 어드벤처에서는 흔히 컷씬이 게임플레이를 중단하는데, 이것이 교묘한 솜씨로 사용된다면 스토리를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최악의 경우("텍스 에브리: 오버시어"[Tex Avery: Oversser] 처럼)에는, 시시한 게임플레이가 끼어드는 서투른 영화나 다를 바 없게 된다. 하지만 최고의 경우("그림 판당고"[Grim Fandango] 처럼)에는, 현존하는 게임플레이와 스토리의 조합 중 최고라고 부르는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및 콘솔 롤플레잉 게임
어드벤처 게임은 그래도 플레이어에게 제시하는 행동의 자유가 많이 제한되어 있다. 디지털 RPG는 좀 더 자유를 준다. 풍부한 캐릭터 디자인과 인벤토리 시스템은 각각의 순간에 더 많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다음에 어떤 길로 갈 것인가를 제법 자주 선택할 수 있어 선형성을 줄인다. 그러면서 여전히 스토리에 충실하게 메여 있어서, 게임 중에 스토리가 진행되고 결국은 대단원에 달한다. 디지털 RPG에는 순간순간에 더 많은 자유가 있지만, 결국에는 선형의 스토리에 메여 있기에 다시 플레이할 가치는 제한된다.
MMO들
대규모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게임[MMO]은 테이블톱 RPG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이 분명하다. 양쪽 모두 캐릭터 디자인 시스템과, 장비와 스킬, 스펠의 정교한 변화를 가지고 있고, 양쪽 모두 게임 대부분이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를 죽이고 보물을 얻으며 캐릭터의 힘이 향상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테이블톱 RPG가 시간이 흐르며 진정한 롤플레잉[역할수행]과 이야기 말하기를 지향하는 쪽으로 발달한 반면, MMO는 대체로 스토리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MMO가 "끝나지 않는 게임"[nerver-ending game]이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결국 변화에 의존하는데, MMO의 플레이어는 게임 세계에 진정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기회를 받지 못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MMO가 어떻게든 플레이어의 행동에 의존해 스토리의 절정으로 향해 간다고 상상해보자. 라이브 팀은 그 결과를 다룰 컨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서버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다른 서버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게임 세계에 돌연 분기가 생기고, 새로운 콘텐츠 개발 문제는 '서로 다른' 세계에 서로 다른 새로운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된다.
종종 어떤 MMO는 시시껄렁한 검과 마법 이야기를 매뉴얼에 써놓고 스토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콘텐츠 업데이트가 어떤 양식에서든 "스토리를 진전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대체로 플레이어는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새로운 콘텐츠, 새로운 몬스터, 새로 탐험할 영역이지, 그에 연결되는 스토리는 플레이하는 방식과는 무관한 것이다. 개발자가 자부심을 가지는 스토리가 있어도, 실제 플레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MMO는 퀘스트를 통해 스토리를 교차시킨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다룰 것이다.
본질적으로, MMO는 "스토리 설정"[story setting]이다. MMO는 스토리와의 접점을 거의 잃어버린 대신에 좋은 소셜 환경이 되었다.
테이블톱 RPG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사람들
테이블톱 RPG의 게임 시스템은 디지털 RPG의 것과 아주 유사하다. 사실 테이블톱 게임의 라이센스를 사용한 컴퓨터 RPG의 경우에는 동일할 때도 있다. 하지만 테이블톱은 훨씬 더 자유로운 형식이다. 게임의 규칙이 전투, 마법 주문, 스킬 같은 플레이어의 행동을 결의하기 위한 구조를 제공한다. 디지털 RPG와 다르게 미리 정립된 스토리라인이 없지만, 대부분의 페이퍼 RPG 룰북에는 초보 게임마스터가 쓸 스토리가 몇 개 포함되어 있다. 보통은 게임마스터가 규칙 시스템을 이용해 플레이어들을 위한 자신의 스토리를 만든다.
디지털 RPG와 달리 페이퍼 RPG는 사교적인 모임이다. 플레이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플레이하며, 순전히 구조의 정황 내에서 각자 캐릭터의 유효성을 최대화하는 롤플레잉을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이 모여 몇 년간 같은 캐릭터로 같은 게임 세계에서 같은 게임마스터와 함께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과정 중에 그들은 긴 캐릭터의 역사를 정립하고, 세계의 배경에 살을 붙이곤 한다. 장기간의 롤 플레이어들에게 그들이 플레이하며 만든 스토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정서적으로 강력하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다. 플레이어들이 그 창조 과정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스토리"는 플레이어들이 친밀하게 개입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플레이어들은 한 번의 특정한 세션이나 다수 세션 플레이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탐험기"[expedition report]를 자주 쓴다. 탐험기는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읽어도 거의 별 감흥이 없다. 플레이어와 각자 캐릭터의 오랜 역사와 설정에 동일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롤플레잉 게이머들은 절대 "스토리"를 재고하지 않는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었고, 자신들이 맞딱뜨린 것들을 어떤 일관된 스토리로 짠다는 것에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그건 그들에게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더해서, 전통적인 테이블톱 RPG는 플레이어에게 역할을 수행하고 이야기를 말하게 하지, 보통 그것을 짜맞출 구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RPG의 규칙은 개별 행동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데 더 관계가 있다. 스토리를 짜는 것은 게임마스터와 플레이어들에게 맡겨놓는다.
"팔방놀이"에서 테이블톱까지
"팔방놀이"에서 테이블톱 롤플레잉까지 스펙트럼을 따라 살펴보았다. 하나의 가지를 가진 서사에서부터, 하이퍼텍스트의 가지치기 구조, 게임북, 솔로 롤플레잉 어드벤처, "드래곤스 레어", 실로 꿴 구슬의 어드벤처 게임, 약간 열린 결말의 구조를 가진 디지털 RPG, 자유로운 형식의 테이블톱. 자잘한 게임 요소를 가진 스토리부터 여전히 스토리에 애착을 가진 게임까지 따라와 보았다.
오직 마지막 게임 양식인 테이블톱만이 우리를 선형성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살아 있는 게임마스터의 창조력에 의지해서이다.
분명, 게임에서 스토리를 말하는 것은 게임을 본질적으로 선형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스토리 자체가 그 성질이 선형이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선형성의 제약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합리적인 행동의 자유를 주는 몇 가지 절충안을 찾아냈다. 그 중에 선형의 결속을 끊고 나올 방법이 있을까?
끼워 넣은 스토리
그 방법 중 하나가 스토리 속에 게임이 있기 보다, 게임에 스토리를 끼워 넣는 것이다. 앞서 보드게임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에서 도중에 작은 스토리[mini-story]가 이야기되는 걸 본 바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MMO의 퀘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플레이어가 NPC와 만나고, 한 이야기의 배경을 듣고, 완수해야 할 일들이 주어지며, 완수하면 보상이 되돌아 온다(흔히 하나의 스토리가 몇 개의 퀘스트로 구성된다). MMO에서 한 캐릭터는 수십, 혹은 수백의 작은 스토리를 통해 플레이하며, 그것이 잘 쓰여지고 잘 구현되었다면 즐거움을 주면서 플레이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의 강점 중 하나가 퀘스트 시스템의 탁월함이다.
이 각각의 작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선형이지만, 서로 다른 플레이어들이 서로 다른 순서로 조우하기에 플레이어 각자의 경험은 다르다. 나아가, 이야기가 작기 때문에 개별적인 개발비용 또한 작고, 모든 플레이어가 모든 콘텐츠에 노출되는 걸 보장할 필요가 없다. 이는 다른 선형적인 게임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시 플레이할 가치를 높여준다.
이것은 분명 MMO와 보드 게임 이외의 게임 양식에서도 가져갈 수 있는 기법이다. 디자이너들이 탐구해보기에도 수월한 영역이다.
알고리즈믹 시스템 +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
전통적으로, 디지털 RPG와 어드벤처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일련의 도전을 제시한다. 각각의 도전은 오직 하나의 해법(보통 하드 코딩된)만을 가진다.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려면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벨도 눌러보고, 책도 써보고, 양초도 써봐야 한다. 보스를 지나가려면 죽여야만 하고, 죽일 수 있는 묘책이 따로 있다.
하드 코딩된 시스템에서 벗어나 알고리즘으로 구동되는 시스템(가령 스킬 중심의 전투가 있는 3D 공간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나 물리 엔진을 쓴 게임)으로 오면, 플레이어가 물리적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개발자가 결정한 하나의 단일한 해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창발의 복잡성이 플레이로 들어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개발자들은 각각의 문제에 적어도 하나의 해법은 있도록 보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더 나은 것은 각각의 문제에 하나 이상의 해법을 보장하는 것이다. "데이어스 엑스"[Deus Ex]가 그 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플레이어는 최소한 세 가지 방법으로 한 레벨을 통과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쏴버리거나, 숨어 다니거나, 사이버네틱 스킬을 이용해 장애물을 해킹하거나.
"데이어스 엑스"도 여전히 미리 정해진 장애물이 배치된 레벨이 변함없이 연속되는 "실에 꿴 구슬" 게임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의 어떤 게임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플레이를 제시한다. 그 스토리는 비록 선형이지만, 다른 전략으로 게임을 끝내보는 것이 흥미롭기에 다시 플레이할 가치가 있는 게임이다.
이것도 선형성의 횡포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경로를 계획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할 콘텐츠를 더 개발해야 하기에 개발자들의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적어도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가치가 있다.
엔딩이 있는 MMO
"사막 이야기"
나는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에 진정한 영향을 미칠 수 없기에 MMO는 의미 있는 스토리를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게임 자체에 엔딩이 있다면 다르다. "사막 이야기"[A Tale in the Desert]가 이를 보여주었다. "사막이야기"는 이제 세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게임은 실제 시간으로 1년 동안 운영되는데, 그 동안 "이집트 사람들"(플레이어들)은 특정한 임무를 완수해 파라오가 "이방인들"과 싸우는 것을 도와야 한다. 성공한다면 파라오(그리고 넓히면 이집트 전체)가 "승리"한다. 실패하면 모두 실패한다. 그 임무란, 피라미드를 짓듯이 플레이어 측에서 진정 엄청난 협력이 요구된다. 그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은 실질적으로 게임의 지형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파라오"(앤디 테퍼[Andy Tepper], 게임의 개발자)도 자주 게임 속에 나타난다.
요는 다른 모든 스토리처럼 결말이 있다면, MMO도 진짜 서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지 않는 데는 사업 상의 이유도 있다. 게임을 끝내면 월정액 결제자의 일부는 다시 플레이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서사론자의 RPG와 자유형식
비록 디지털 게임은 더욱 더 전형화되어 왔지만, "인디" RPG 디자이너들과 취미 개발자들은 오래된 RPG들의 관습을 뒤집거나 제거함으로써, 잘 정의된 스토리 경험을 만들어 내도록 설계된 게임과 시나리오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인디 RPG 운동은 그들이 "게임론자-서사론자-시뮬레이션론자 이론"[Gamist-Narrativist-Simulationist theory]이라 부르는 이정표를 잡아, 전통적인 게임플레이 경험이나 우수한 스토리, 어떤 형태의 사실주의를 찾는 롤플레잉 게이머들을 붙잡았다. 비록 이 이론가들의 대표자인 론 에드워즈[Ron Edwards]는 특정한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두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Edwards 2001), "인디" 프로젝트 전반에 있어서는 "서사론자" 게임에 대한 궁리를 우선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폴 체제[Paul Czege]의 "주인님과 함께"[My Life with Master]가 그 예이다. 이 게임은 불변의 서사선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플레이어가 "주인님"의 하인이고, 게임의 끝에서는 성난 마을사람이나 다른 어떤 원인으로 주인님이 죽는다. 게임의 과정 속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주인님이 강요하는 임무에 따른 자기혐오로 죽거나, 어떤 형태의 사랑이나 희망을 찾고 다가올 대격변을 피해 도망가게 된다.[footnote]
잔 반 루이의 해설:
"주인님과 함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폴 체제의 주인공주의[portagonism]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라.
[/footnote]관습적인 테이블톱 RPG와는 달리, "주인님과 함께"는 임무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규칙이 없다.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바라는대로 임무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 이 게임은 "장면"[scene] 속에서 플레이되는데, 한 장면이 시작되면 주사위를 굴려 그 장면의 결론이 캐릭터에게 긍정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고, 플레이어는 게임마스터가 보조하여 장면과 그 결과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주인님과 함께"는 임무를 해결할 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쓴 것은 서사의 해결을 내놓는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한 장면 속에서 사건의 세부사항은 자유롭게 열려 있어 플레이어가 바라는대로 결정되지만, 궁극적인 결말은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주인님과 함께"는 앞서 말했던 스토리를 내도록 게임을 "제약하는" 완벽한 예이다.
모든 서사론자가 이런 접근법을 취하진 않는다. 이 장르의 매력은 그것을 하는 사람이 취하는 일탈적이고 상상적인 접근법에 있다. 또 다른 예가 론 에드워즈의 "마법사"[Socerer]이다. 이 게임은 구체적인 과업의 결말을 결정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지만, 그 주안점이 개인의 심리와 특정한 기분, 미묘하고 섬찟하며 공포스러운 기분에 있다. 그 모토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이다. 각각의 플레이어 캐릭터는 내면에 악마를 지닌 사람이다. 제목 그대로, 각각이 현대 세계에 살아가는 마법사로, 악마를 자기 속에 봉인하고 있다. 각자 악마를 끄집어내 개인적으로 큰 대가를 치루고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인디 RPG 운동은 주로 관습적인 테이블톱 RPG를 취해 서사 꾸미기를 지향한 반면, 주로 스칸디나비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취미 그룹은 "자유형식"[free-form]이라 알려진 게임 양식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테이블톱에서 RPG를 취해서 즉흥 연극으로 방향을 틀었다. 혹은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을 취해서 "옷을 차려입고 서로를 나무막대를 때리는" 것을 빼버렸거나.
자유형식은 수 명에서 수십 명의 플레이어를 상정한 시나리오로, 몇 시간이나 (기껏해야) 며칠간 플레이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일반적으로, 과업을 해결하기 위한 규칙은 없거나 최소한이다. 대신 한 명 이상이 테이블톱 게임의 게임마스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하지만 게임 내에서도 적절한 역할을 맡는다). 자유형식은 즉흥적인 롤플레잉을 위한 설정과 구조를 제공한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역할을 맡고, 때로는 게임 운영자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대체로 상황에서 즉석으로 한다.
훌륭한 예가 쏘르비욘 프리츤[Thorbiörn Fritzon]과 토비아스 릭스타드[Tobias Wrigstad]의 "업그레이드"[The Upgrade]로, 스칸디나비아에서 몇 번의 이벤트로 플레이되었다. "업그레이드"의 플레이어들은 "업그레이드"라는 리얼리티 TV 쇼에 참가하는 경쟁자이고, 모든 플레이어가 각자 결혼했거나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다. 게임에서 커플은 서로 떨어지고, 리얼리티 쇼가 촬영되는 기간 동안 시간을 함께 할 다른 파트너와 짝이 된다. 쇼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나면, 각각의 플레이어는 그의 원래 파트너와 함께 할 것인지, 쇼에서 짝을 이루었던 사람으로 "업그레이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실제 리얼리티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급한 시나리오다.
게임마스터들은 쇼의 프로듀서 역할을 맡고, 플레이어는 "업그레이드"가 촬영되는 열대의 섬에서만 모든 경험을 플레이하지 않는다. 대신 GM이 그들을 앉혀 놓고 "다음 클립을 소개"하며, "음, 한나가 라스와 산책하던 중에 아주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는데요.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줄래요, 한나?"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 한나는 스튜디오 방청객에게 몇 마디를 한 뒤 "클립을 자르고", 한나와 라스가 그 장면을 롤플레이한다. 다른 플레이어가 그들을 멈추고 "열 두 살의 한나" 혹은 "쇼가 끝나고 3개월 뒤의 라스" 같은 말을 할 수 있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 때 선택된 플레이어는 작은 장면을 플레이하는데, 한나와 라스의 플레이어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연관된 역할을 취하고, (과거 장면에서) 인물을 확립하거나 "가능한 미래"를 상상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플레이어는 자신의 인물의 본성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가지지 않는다. 과거 장면이 인물에 대한 것을 확립할 수 있어서 플레이어는 반드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롤플레이를 해야 한다. 비슷한 식으로, "진행자들"이 액션을 멈추고 자신들만의 장면을 롤플레이할 수 있다(가령, 두 사람이 그 날 밤에 제작용 트레일러 차량에서 라스가 그물에 걸려 들었다니 믿기지 않는다고 술을 마시며 웃는 장면처럼). 그러면 다시 "클립"으로 "돌아올 때" 라스는 언급된 사건을 롤플레이해야 한다.
말하자면, 여기에 구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규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취지는 즉흥적인 역할수행이고, 규칙은 과제 해결의 세부사항을 다루기 보다 역할수행을 일관된 서사선에 맞게 다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살렌과 짐머만은 분명 이걸 "게임"이 아니라고 하겠지만(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수량화된 해법"이 없다, Salen and Zimmerman 2003), 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미디어로의 이전?
서사론자의 RPG와 자유형식에서 얻은 교훈을 디지털 미디어로 가져올 수 있는가는 알기 어렵다. 게임마스터와 플레이어의 창조력에 크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창조력"은 보통 "제한되고 미리 생성된 자산"과 연계해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더 개괄적인 교훈은 얻을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플레이어 행동의 제약을 해방하면 게임의 서사를 제약하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플레이어에게 게임공간에서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실 끊기
기존의 게임 양식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내가 볼 때는 "실로 꿴 구슬"의 접근법으로 가능한 것을 기본적인 것만 변화시키기만 해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매력적인 스토리를 내보이는 게임에 가까워지고 싶다면 다른 접근법을 실험해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해볼 수 있는 접근법은 앞서 제안했듯이, 게임에 한정된 서사를 부과하면서 그 고정점 사이에서 플레이어에게 높은 수준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과 끼워 넣은 서사가 있다.
일반적으로, 스토리와 게임을 분리된 개체로 생각하고 그들을 통합할 기발한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제약된 서사 속에서 플레이어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거나 한 구역에서는 플레이어의 자유를 구속하고 다른 곳에서는 창발적인 서사를 위해 해방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게임의 요구와 스토리의 요구 사이에 대립이 있기 때문에, 그 대립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몇 가지 흥미로운 게임 양식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인터랙티브 픽션"이라고 부를 만한 것에 가까워지려면, 구슬을 꿴 실을 끊고 다른 접근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인용된 저술
Coover, Robert (1992). "The End of Books."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11 (June 1992): 23 - 25.
Cortázar, Julio (1987). Hopscotch. New York: Pantheon Books.
Costikyan, Greg (2000). "Where Stories End and Games Begin." Game Developer 7, no. 9 (2000): 44 - 53.
Edwards, Ron (2001). "GNS and Other Matters of Role-playing Theory." Chicago: Adept Press.
Joyce, Michael (1990). afternoon: a story. Watertown, MA: Eastgate Systems.
Salen, Katie, and Eric Zimmerman (2003). Rules of Play: Game Design Fundamentals. Cambridge, MA: MIT Press.
Wardrip-Fruin, Noah, and Pat Harrigan (2004). First Person: New Media as Story, Performance, and Game. Cambridge, MA: MIT Press.
인용된 게임
A Tale In the Desert. Andrew Tepper; eGenesis. 2003 - 2005.
Colossal Cave/Adventure. William Crowther (ca. 1975) and Don Woods (1976). ca. 1975/1976.
Dragon's Lair. Rick Dyer, Advanced Microcomputer Systems (AMS); Don Bluth, Bluth Studios; Cinematronics. 1983.
Dungeons & Dragons. Gary Gygax and Dave Arneson; Tactical Studies Rules (TSR). 1974
My Life With Master. Paul Czege; Half Meme Press. 2003.
Sorcerer. Ron Edwards; Adept Press. 2001.
Tales of the Arabian Nights. Eric Goldberg; West End Games. 1985.
The Upgrade. Thorbiörn Fritzon and Tobias Wrigstad. 2004 - 2005.
댓글 7개:
와우~ 굉장히 잘 정리된 이야기네요.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예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게임들이 아니라 조금 아쉽네요. 또 한번 좋은 번역에 감사 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상합니다.
글쓴이는 어째서 '분기가 없는 게임' 은 완성도가 낮다고 생각할까요?
그리고 게임의 스토리텔링 매체로서의 가능성은 기존 선형적 매체와 방법론 자체가 다른데 어째서 소설류와 비교가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게임은 체험함으로서 스스로 통찰을 얻는것이 가능한 매체고, 소설은 주어진 이야기를 읽고 그 스토리 안에서 직접적스로 작가의 통찰을 전달받는 방식인데 그것이 어째서 같은 형식으로 비교가 될 수 있는지..
'분기가 없고, 결말이 있는 이야기' 가 보다 확실한 내러티브적 감동을 줄 수 있는건 사실이지만, 분기가 있음에도 그에 못지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역사가 적어 나오지 못했을 뿐이지 불가능하진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더 큰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매체가 바로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컨대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두 소년소녀의 감수성짙은 사랑이야기를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는것도 훌륭한 경험이지만, ICO같은 게임을 통해 두 소년소녀의 애틋한 감정을 직접 체험하면서 경험하는것도 그에 못지않은 감동적인 경험입니다. (물론 ICO보다 소나기가 문학적으로 월등한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독자/유저로서 받는 감동의 수준은 두 작품간에 별 차이가 없다고 보여집니다.)
물론 2007년도의 글이고, 그 사이에 게임에 대해 보다 많은 가능성이 탐구되었기에 이런 반박도 가능한 것이겠지만, 2007년도면 게임적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 바이오쇼크가 GOTY를 30개 넘게 수상하면서 게임의 미디어로서의 가능성이 활발히 재평가되던 시점인데 어째서 이런 글이 나왔는지 참 의아스럽네요...-,-a
@NJWS - 2011/01/05 23:58
번역자입니다.
글쓴이가 딱히 어떤 형식이 더 낫다/아니다 가치판단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분기가 없는 게임'이 완성도가 낮다기보다는, 스토리의 선형적 성격(분기 없음)을 강화하다보면 게임의 비선형적 성격(상호작용성)이 약화된다(게임으로서의 완성도가 낮아진다)는 것이겠지요.
그 결합(혹은 구성)이 "드래곤스 레어"처럼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와 "그림 판당고"처럼 제대로 된 경우를 비교할 수는 있겠지요.
"바이오쇼크"의 경우는 일단 글쓴이가 참고할 겨를은 없었을 것 같구요(글을 제출하고 리뷰받는 기간도 있으니).
글을 번역한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이오쇼크"도 환경의 높은 밀도와 도덕적 선택을 다루는 점이 돋보이긴 하지만, 스토리텔링 구조 자체에 큰 전환을 이루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 구성이 주는 경험은 여느 게임보다 빼어나다 생각합니다.
@NJWS - 2011/01/05 23:58
예, 바이오쇼크에 대해 말씀하신 것 동의합니다.
댓글도 드문 곳에 좋은 의견 올려주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흐흐.
@밝은해 - 2011/01/06 19:20
다시 읽어보니 우열이 아닌 선택에 대한 글이었군요. 제가 글의 목적을 오해한것 같습니다. (게임의 미디어적 가능성에 대한 공격에 하도 시달리다보니 비슷한 언질만 있어도 흥분하는지라..)
저는 바이오쇼크가 기존의 게임의 스토리텔링 방식으로부터 시스템적인 변화를 이룩했다는 말이 아닌, '어떻게 해야 게임이라는 미디어가 원래부터 갖고있던 특징들을 스토리텔링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란 질문에 대해 이 게임이 상당히 설득력 있는 답안을 제시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NJWS - 2011/01/06 19:23
넵~ 저도 이렇게 좋은 주제의 글들이 번역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서 어제부터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활발한 토론이 오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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