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13일

크로포드, “자유의지와 결정론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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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크로포드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디자인 8권 (1994-1995) 수록

원제: Interactivity, Plot, Free Will, Determinism, Quantum Mechanics, and Temporal Irreversibility (원문보기 [영어])


 

그렇다. 믿거나 말거나, 상호작용, 플롯, 자유의지, 양자역학, 일시적 비가역성, 이 여섯가지는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인터랙티브 스토리를 디자인하는 데 유용한 진실들을 밝혀줄 한 방법과 관련이 있다. 이 글에서 그 접점을 밝혀볼 것이다.

먼저 살펴볼 것은 플롯과 상호작용의 대립이다. 이 대립에는 이론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플롯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잘 보인다. 그들 대부분은 작가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롯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로 훌륭한 재능과 창조적인 에너지를 요한다.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플롯을 관객이 휘젓도록 하는 것은 그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플롯이 잘 들어맞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그들은 관객의 간섭이 불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호작용이 관객으로 하여금 플롯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상호작용과 플롯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이 분명한 사실과 함께 다른 쪽의 태도를 살펴보자. 상호작용의 주역들은 플롯에 있어 둔한 경향이 있다. 이 가장 강력한 예로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이드 소프트웨어와 <둠>(Doom)의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어떤 이야기냐면, 조직 내에서 게임에 있어 이야기(스토리, story)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한 쪽은 이야기 요소가 다른 모든 요소를 엮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쪽은 <둠>은 순수하고 단순한 액션 게임이고, "이야기 따위는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반(反) 이야기 파가 승리하고 패자는 회사를 떠났다. 오늘날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이야기는 'S-워드'라고 불린다. 그런 이야기다.

CD로 나왔던 가장 강력한 스토리텔링 제품 중 하나인 <롤랜드의 광기>(The Madness of Roland)를 보자. 이건 어떤 상호작용도 없는 이야기였다. <롤랜드의 광기>의 저자는 스스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상호작용 따위는 필요없어."

특히 흥미로운 것은 플롯과 상호작용이 판매량에 있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이다. 지난 해 최고의 게임들은 모두 상호작용으로 가득하고 플롯은 없었거나(<둠 2>), 플롯으로 가득하고 상호작용은 없었다(<미스트>, <7번째 손님>). 그 중간에 뭔가 있지 않을까?

결국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플롯과 상호작용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아도 직접적인 경험으로 보아도, 플롯과 상호작용은 융화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이라는 꿈이 일종의 키메라(chimera)라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역사 속에서 몇몇 현인들은 이 문제를 두고 분투하기도 했다. 그들의 노력은 계몽을 불러오기도 했다. 자, 어떻게 게임 디자인 문제가 과거의 위엄있는 사상가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사실 그들은 게임을 생각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더 큰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고전적인 자유 의지(free will)[footnote]역주: 존재가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footnote]와 결정론(determinism)[footnote]역주: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footnote]의 문제이다.

"플롯 대 상호작용"과 "자유의지 대 결정론" 사이의 접점은 무엇일까? 이렇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자애로운 의지에 따른 것이다. 분명히 악도 존재하지만, 그것도 모두 신의 위대한 목적의 일부이다. 이는 필히 사람의 행동과 자연현상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끔찍한 재앙도 "신의 일"인데, 살인 역시 그렇다. 어떻게 인간 존재가 어떤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들은 전능한 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 만일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신 역시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할지도 제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를 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자유 의지는 결정론과 충돌한다.

이 대립과 게임의 접점은 분명하다. 신학의 결정론은 스토리텔링에 있어 플롯과 유사하다. 자유 의지는 상호작용과 일치한다. 어떻게 플레이어가 자유 의지 없이 상호작용을 하겠는가? 실제로 우리는 창작하는 사람을 작은 우주의 창조자로 보면 더 분명히 유추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화자(스토리텔러)는 그의 등장인물로 차 있는 가상의 우주를 창조한다. 그는 전능한 신처럼 그 인물들의 행동을 결정하고 운명을 결정짓는다. 이 유추를 뒤집어 보면 우주의 역사는 신이 써내려간 거대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기다려보라. 게임 창작자 역시 일종의 신이다. 그 역시 작은 우주를 만들고 그 우주에서 신과 같은 제어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게임의 우주에는 자유 의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서 자유 의지란 건 환상해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견해로 앞서갈 수도 있다. 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길 원하지만, 사실 우리의 행동은 모두 결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 자의적인 결정을 신중하게 내림으로써 자유의지가 있다고 단언할지라도, 그것 역시 신의 계획으로 설명할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와 결정론 간의 논쟁은 70년 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양자역학의 도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불확정성 원리는 우주의 기본적인 작용이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인 것임을 입증했다. 그것은 이 우주가 기능하는 데 근간이 되는 대부분의 기본적인 과정들이 예측불가능한 것임을 나타낸다. 이는 결정론을 논외로 만들어 버렸다. 만약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나 어디로 갔는지조차도 확신하지 못 한다면, 인간 존재처럼 복잡한 체계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예정설은 쓸모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 의지가 진정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양자역학은 무작위성으로 결정론을 대체했다. 우리의 운명은 지옥에 갈 것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다. 모두 동전을 던져서 어느 면이 나오느냐에 달렸다.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양자역학은 또 다른 귀결을 이끌어 낸다. 결정론을 산산조각 냈을 뿐 아니라, 일시적 비가역성 역시 산산조각 냈다. 물리법칙이 시간의 흐름을 타듯이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관념이다. 양자역학 이전에는 물리학자들이 왜 시간이 항상 앞으로만 가는지 설명할 수 없어 난처해 했다. 물리학의 전체적인 구조에 있어, 시간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근거가 없었다. 시간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은 물리학의 실존을 흐트러 트렸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그 모든 것을 바꾸었다. (경고: 이 시점부터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사실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맥스웰의 도깨비(Maxwell's Demon,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하는 상상의 생물. 즉 시간의 단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는 레옹 브리우웽(Léon Brillouin)이 양자역학적 주장을 이용해 끝내버릴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불확정성 원리로 생각한다면 양자역학과 일시적인 비가역성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은 더 쉽다. 이 원리는 우주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이제 이 사실과 "흥미를 끄는" 정보라는 지식을 조합해보자. 말하자면, 한 번 어떤 물리 체계에 대해 얻은 정보는 나중에 그 체계에 대해 취한 정보와 조합하여, 측정된 정보의 단순한 합을 넘을 만큼 체계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두 측정 사이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 수록 두번째 측정에서 더 "흥미로운"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물론 이 우주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고, 따라서 불확정성 원리를 위반한다. 이 명백한 난제의 해법은 정보가 시간과 함께 "퇴색된다"(degrade)는 사실에 있다. 어떤 물리적 체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이후에 정보를 더 얻는다면, 두 측정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의미있게 조합할 수 없다. 왜냐면 체계는 무작위로 변화해 그 조합을 쓸모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은 불확정성 원리가 일시적 비가역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불확정성 원리에서 비롯된 정보의 필연적인 퇴색으로 정의되는 화살(arrow)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게 대체 게임 디자인이란 무슨 상관일까? 자, 일시적 비가역성에 대해 말해보자. 컴퓨터 게임은 그 우주 속에 일시적 비가역성을 허락한다. 어떻게? 간단하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아주 중요한 시기에 맞딱뜨리게 된다. 게임을 세이브하고, 2번 문을 선택한다. 아, 오크에게 먹혔군요! 걱정 없다. 다시 게임을 불러서 2번 문을 피하면 된다. 사실상 시간을 거슬러서 결정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행동이 자유의지를 증명한다. 당신이 오른쪽 길을 선택하면, 누군가는 당신이 오른쪽 길로 가게 될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다시 돌아가 왼쪽 길을 선택하면, 누구도 운명예정설을 떠들지 못 한다. 일시적 비가역성은 자유 의지를 입증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어떤 디자이너들(대부분 상호작용하지 않은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다시 불러오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이 가능성을 제거하고 디자인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자유의지에 원한이라도 품고 있는 것 같다.

실제 세계에서는 일시적 비가역성을 가질 수 없다. 즉, 그것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일시적 비가역성은 신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게했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만약 우리가 시간을 돌아가 우리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 우리가 제시할 수 없는 사실은, 아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 물리학, 게임 디자인을 모두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문제 위에 놓을 수 있다. 실제로, 여기서 제시한 게임 디자인과 신학의 병합은 실험적 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낳을 수도 있는 지적 가능성이다. 국립 과학 재단에 허락을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처럼,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있다. 물리학을 수용하고 신학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신은 자료가 아니라 처리에 관해서 전능하다.[footnote]역주: 자료[data]와 처리[process]. '1 + 1 = 2' 가 있다고 하면, 두 개의 '1'과 하나의 '2'가 자료고, 더하기(+)가 처리다. 크로포드는 여러 에세이를 통해 게임은 자료(그래픽, 사운드, 텍스트)의 출력이 아니라 그 자료를 처리하는 것(상호작용과 연산)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footnote] 즉, 신은 그의 법대로 우주를 제어한다. 하지만 그 디테일은 신경쓰지 않는다. 신은 이 우주의 모든 전자와 양자의 위치와 속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대신, 단지 선언한다. "물리학이 있으라." 그리고는 우주의 시계태엽장치를 그의 법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간접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그가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제어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간접적인 제어일 뿐이다.

이 현실화는 자유 의지와 결정론 사이의 대립에 대한 해법을 제공한다. 신은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를 결정했지만, 우리가 우주 속에서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다. 게다가 그 체계에 작은 무작위성을 첨가해 우리가 우리 주변의 환경에 로봇처럼 반응하는 기계장치가 아님을 보증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신은 처리에 집중하는 디자이너이다!

똑같은 해법이 줄거리와 상호작용 간의 대립에서도 적용된다. 당신이 자료에 집중하는 디자이너라면 당신은 분명 결정론적인 사람이다. 성경을 두드리는 근본주의자처럼, 당신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당신이 쓰는 모든 단어에 말 그대로 순종하기를 강요한다. 근본주의자는 그 믿음을 모두 성경의 자료에 쏟는다. 성경 뒤의 과정이 아니라.

하지만 만약 당신이 신처럼 처리에 집중하는 디자이너라면, 당신의 우주 속에 있는 인물이 당신의 물리 법칙 영역 속에서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당신은 직접 제어하고픈 욕망을 버리고, 간접적인 제어에 기대야 한다. 즉, 줄거리의 자료를 세세히 기술하는 게 아니라, 극적 대립의 과정을 기술해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했느냐를 정의하는 대신,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다양한 것을 할 수 있는가를 정의해야 한다.

이것이 너무 난해하고 간접성이 좋은 이야기의 요건인 어조(tone)의 풍부함을 해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진정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라. 이야기는 원리(principle)를 전한다. <백경>(Moby Dick)은 고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유에 대한 이야기다. 루크 스카이워커[footnote]역주: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footnote]는 거짓이다. 그 영화의 진실은 성장과 성년의 도전에 맞서는 것이다. 그게 진짜 메시지다. 이야기는 말 그대로 거짓이고, 그보다 더 높은 진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적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원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진실이다. 그것은 자료에 있어서는 거짓이지만, 처리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화자와 청자 사이의 소통의 본질을 고려해보자. 화자는 무언가 소통할 진실, 인간 조건의 어떤 원리를 찾는다. 진실 그 자체와 소통하기 보다는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진실을 예시하는 특정한 상황 설정을 만든다. 화자가 청중에게 그 예시를 전한다. 청자는 그 이야기를 해석한다. 이야기의 세부사항에서 더 높은 원리를 도출해 낸다. 하지만 이 과정은 간접적이라는 것을 주지하자. 화자는 인간 조건의 진실을 소통하고자 하고, 청자는 동일한 것을 알고자 한다. 하지만 그냥 원리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화자는 원리를 예시로 번역하고, 예시로 소통하며, 청자는 예시를 다시 원리로 번역한다. 이것이 바로 진짜 제대로 된 과정이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interactive storytelling)은 이 과정과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먼저, 원리를 예시로 번역하는 과정을 컴퓨터에게 위임한다. 화자는 여전히 예술적 통제력을 완전히 가지고 있지만, 이제 그 제어를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수행해야 한다. 원리를 예시로 번역하는 기본 과정은 컴퓨터에 의해 수행된다. 물론 이것은 알고리즘 생성에 상당한 노력이 들어간다. 두번째 근본적인 차이점은 이야기가 플레이어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여 실시간으로 생성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인 이야기는 청자의 요구와 흥미에 따라 변화하고, 따라서 세련되지는 못 할지라도 굉장한 감정적 참여를 불러온다.

누군가는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실질적으로 원대한 원리를 위해 스토리텔링을 줄이는 것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정말 심원한 지적 프로세스를 다뤄본 적이 없다고 비평가들은 소리친다. 그런데 이 처리 중심의 스토리텔링은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그것도 아마추어들이 해왔다. 자, 할아버지가 꼬마 애니에게 침대에서 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할아버지, 이야기해줘!" 그녀가 말한다.

"좋지" 그가 답한다. "아주 먼 옛날에, 조랑말을 가진 작고 귀여운 소녀가 있었는데..."

"하얀 조랑말이야?" 애니가 끼어든다.

"오, 이런, 그렇단다. 눈처럼 하얬단다. 너무 하얘서 털에 반사된 태양빛에 눈이 멀 정도였지. 작은 소녀와 조랑말은 해변을 지나려는 참이었는데..."

"산도 갈 거야?"

"그럼, 아무렴, 그렇지. 해변을 지나오고서, 녹색 계곡을 지나, 덤불을 뛰어넘고 고개를 숙여 나뭇가지 밑을 지나 산 정상으로 향했지. 그리고 거기서 커다란 바위를 뛰어넘으며 놀았단다..."

"난 뛰어넘는 거 싫어."

"자 그럼, 뛰어넘는 것 대신, 소녀는 조랑말이 산 정상의 풍성한 잔디풀을 뜯어먹게 두고는 햇빛을 쐬며 앉아 있었단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애니가 이야기에 끼어들 때 할아버지가 "닥쳐, 꼬맹아, 내가 조심스럽게 준비해 놓은 플롯을 망치고 있잖아!"라고 소리치지 않은 것에 주목하자. 그는 애니의 개입을 원한다. 그의 스토리텔링은 개입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할아버지는 세심하게 짜여지고 다듬어진 줄거리를 준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애니에게 맡겼다. 그는 단지 스토리텔링의 기본 원리만 준비했고, 애니의 요구와 흥미에 반응하여 이야기를 꾸며 나갔다. 그가 만든 이야기는 그 자신과 애니만을 위한 특별한 이야기다. 다른 어떤 이야기도 똑같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이고, 헐리우드의 어떤 하이 테크놀로지 호환찬란쇼보다도 강력한 감정적 힘을 가지고 있다. 맞다. 세심한 줄거리도아니고, 복잡한 전개도 없고, 헐리우드의 호화스러운 특수 효과도 없다. 하지만 그 조잡함은 개인화로 상쇄된다. 애니는 물론 영화 <라이온 킹>을 좋아하겠지만, 애니와 하얀 조랑말 이야기를 보물로 간직할 것이다.

자, 뭐 시시한 아마추어 스토리텔링 할아버지가 해낼 수 있는 거라면, 거물급 전문가들이라고 왜 못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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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

trackback from: a라는 사람이 어느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a라는 사람이 어느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a는 평생을 감옥에서 살다가 사망하였습니다.



a는 이제 b라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b는 인생을 살아가는 도중 어느날 살해 당하여 사망하게 됩니다.

b를 살해한 사람은 바로 a였습니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까요?

이야기는 인과응보라는 용어에 100% 부응하는 내용입니다.

a는 살인을 저지른 죄에 대한 응보를 100% 받게 되는 수학적으로 완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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