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26일

바이오쇼크의 서사와 유희의 부조화 (웰 플레이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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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의 주간 2일차입니다.

유비소프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린트 호킹(Clint Hocking)이 쓴 《바이오쇼크》에 대한 비평입니다. 호킹이 글 속에서 간략히 잘 설명했듯이 그는 이 비평을 구입 여부에 도움을 주려는 리뷰와 달리, 게임을 이미 해본 사람을 위해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을 나누려고 쓴 것입니다. 때문에《바이오쇼크》를 플레이해본 적이 없는 분들은 글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직접적인 스포일러는 없으니 주제 자체에 흥미가 있다면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이 비평은 카네기 멜론 대학의 ETC(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 센터)의 출판부에서 발행한 게임비평 모음집 "웰 플레이드"(Well Played 1.0)에 수록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은 판매하기도 하지만, 그 텍스트를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읽을 수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수록된 비평을 주욱 살펴봐도 좋겠지요. 문서고에서는 이 책도 지속적으로 번역할 것이니, 지켜봐주세요 :)



클린트 호킹

2009년 3월 10일

원문보기 [영어]

라이센스: CC BY-NC-ND


2006년, 나는 이언 보고스트(Ian Bogost)가 《불리》(Bully)를 비평한 것칭찬하며, 게임 리뷰와는 다른 게임 비평이 부족하다고 한탄했었다. 간단히 말해서, 게임 비평은 게임의 본질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싶어하는 게임 개발자와 전문가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리뷰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대중이 어떤 게임을 살 것인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둘 다 가치 있고 중요한 기여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딱 한 가지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은 《바이오쇼크》(Bioshock)의 리뷰가 되진 않을 것이다. 《바이오쇼크》의 리뷰를 원한다면, 이 글의 참고자료[footnote]GameSpot, GameSpy, GameTrailers, IGN, Fragland, GameCritics, GameRankings, 1Up.[/footnote]에 달아 놓은 웹사이트들을 방문하길 바란다. 이 글은 《바이오쇼크》의 비평이 될 것이다. 나는 《바이오쇼크》를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끝냈다. 왜냐면 이 게임은 서사로 펼쳐지고, 이 비평은 서사와 플레이가 교차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게임을 철저하게 플레이하는 것이 이 비평을 형성하는 데 알맞은 양의 투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글에 들어가기 앞서, 이 게임을 만든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이게 리뷰였다면 게임을 빛내주었겠지만, 비평으로서는 꽤 거칠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게임을 대체로 잘 즐겼다. 《시스템 쇼크 2》(System Shcok 2)를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몇 가지 사소한 트집은 제쳐놓고, 기본적으로는 훌륭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바이오쇼크》가 기대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조[시스템 쇼크 2]가 우리에게 매력적이며, 중요하고, 경이로운 질문들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는 《바이오쇼크》가 그 질문들에 대체로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우며, 기만적이며, 만족스럽지 못 한 답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핵심부터 바로 꺼내보자면, 《바이오쇼크》는 게임으로서의 정체성과 스토리로서의 정체성 사이의 극심한 부조화를 보인 듯 하다. 작품의 서사와 유희[ludic][footnote]역주: 개인적으로 ludic의 번역어를 단순히 '유희'라고 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적당한 용어가 없다. ludic은 라틴어로 영어 play를 의미하는데, 이 의미에는 '재미'의 성질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근래의 비디오게임의 출현과 성장 이후의 ludic은 재미의 성질보다는 게임의 규칙과 목표성을 나타낸 말이라고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번역자 개인이 단언하긴 어려우나, 이 글 안에서만큼은 그런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으로 나오는 유희는 모두 ludic을 번역한 것이다.[/footnote]의 요소를 대립에 빠트림으로써, 게임은 게임의 허구를 믿었던 플레이어를 대놓고 조롱하는 것 같다. 유희 구조를 거스르는 서사 구조는 플레이어가 어느 한 쪽에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훼손하기만 해서, 플레이어로 하여금 항의의 표시로 게임을 내던지거나(내가 거의 그랬듯), 이 게임은 게임으로서도 스토리로서도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전히 끝내기 위해서 끝내게 된다.

그럼 이 부조화는 어떤 모습이고 왜 그것이 작품의 내적 일관성을 송두리째 흩어 놓았을까?

《바이오쇼크》는 자유와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게임이다. 랜드의 객관주의에 대한 고찰이자 비판이다[footnote]역주: 아인 랜드(Ayn Rand)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그가 주장한 객관주의는 인간의 목적은 자신일 뿐이고, 다른 이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기에,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켜서도 자신을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인 랜드는 또한 평등주의자와 객관주의자 간의 대립을 다룬 소설 《아틀라스》(Atlas Shrugged, 1957)를 쓰기도 했다.[/footnote]. 보다 분명히 하면, 이 게임은 합리적 이기심이 도의거나 선[善]이라는 관념은 덫이며, 완전하고 억제되지 않은 자유로부터 비롯된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한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두 가지 계약을 제시하며 시작한다.

하나는 유희적 계약으로, 말 그대로 '힘을 추구하면 진행함'이다. 유희적 계약은 랜드의 합리적 이기주의에 근거를 둔 가치와 상통한다. 게임의 규칙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최선인 것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게임 월드 속의 다른 캐릭터들(아니면 최소한 플레이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플레이어와 직접적인 대립을 하는 경향이 있는 싱글 플레이어 게임에서는 꽤 표준적인 가치이다. 그런데 《바이오쇼크》는 훨씬 더 나아가서 리틀 시스터를 통해 눈부신 방식으로 게임의 메커닉적 계약을 서사에 묶어놓는다. 잘 실현된 콘텐츠 속에서 이 계약의 메커닉을 '가장함'으로써, 나는 말 그대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리틀 시스터를 채취함) 내게 최선인 것(아담을 더 얻는다)을 함으로써 얻는다는 것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유희적 계약은 내가 진짜로 메커닉을 통해 표현된 게임의 주제를 느낀다는 감각으로 작용한다. 이 게임은 말 그대로 내가 구할 수 없으리라고 단정한(혹은 그럴수 있다 해도 테넨바움의 손에서 더 고통받을) 리틀 시스터의 운명에 냉정한 초연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그들을 채취하는 것은 메커닉적으로 최선의 선택일 뿐 아니라, 또한 올바른 선택으로 보였다. 이 게임은 그처럼 내가 도덕적 환경에 있지 않을 때 고려할 사회적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의 의미를 느끼고 경험하게 해줬어야 했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이 게임은 내가 이 어려운 철학을 적용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스스로가 앞서 말한 '덫'에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도록 시스템과 콘텐츠가 게임의 풍경을 천천히 변형하여 나를 압박하는 환경에 처하게 했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가 첫 번째 유희 계약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계약으로 가면, 게임은 산산히 부서진다.

게임의 두 번째 계약은 서사 계약으로, '아틀라스를 도우면 진행함'이다. 이 서사의 계약에는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먼저, 이 계약은 랜드의 합리적 이기주의에 근거한 가치와 상통하지 않는다. '타인을 도우라'는 것이 스토리 상에서 옳은 것으로 제시되는데, 메커닉 상에서는 전혀 반대의 것이 옳은 것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아틀라스가 라이언과 반대된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메커닉을 수용함으로써 철학적으로는 라이언과 한 배를 탔다. 왜 내가 라이언을 저지하거나 죽이고 아틀라스의 말을 들어줘야 하나? 사실상 라이언의 철학이 내가 플레이하며 경험한 메커닉의 지표가 되는 원칙이다.

세 번째, 계약이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아틀라스를 도와줘야 하는 게임의 디자인에 구속된다. 심지어 내가 타인을 돕는다는 원칙에 반대했다 해도 말이다. 게임을 앞으로 진행하려면, 반드시 아틀라스가 말하는 대로 해야하고, 게임은 라이언과 아틀라스의 대립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게임의 메커닉에서는 객관주의자의 접근법을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받았지만, 또한 그 접근법을 거부하고 내게 최선인 일은 아니더라도 리틀 시스터를 구할 자유도 있다(비록 이 데이터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 의미가 약해지지만).

반면 게임의 허구에 있어선, 아틀라스를 도울지 말지 선택할 자유가 없다. 유희적 계약 하에서 내가 객관주의자의 방식을 적용하기로 했다면, 리틀 시스터를 채취할 수 있다. 내가 그 접근법을 거부하고 그들을 구할 수도 있다. 스토리 아래서는, 객관주의자의 방식을 거부하면 아틀라스를 돕고 라이언을 저지할 수 있는데, 객관주의자의 방식을 택하면, 유감스럽게도...게임을 그만 할 수 있다. 그게 전부다.

그것이 내가 말한는 불일치고, 교란이다. 교란되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니, 용서를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자. '그래, 이건 게임이야. 메커닉이 너무 훌륭해서 스토리란 건 캐릭터를 벗어나 뭔가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한 거야...' 이것만 그런 것도 아니다. 많은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서사를 강제한다. 그런데 플레이어가 아틀라스를 도우는 것이 왜 유희적 계약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는 서사였는가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면, 교란은 모욕이 된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불신을 거두었던 우리를 대놓고 조롱한다.

그 느낌은 스파이크 존즈 이케아(Spike Jonze Ikea)의 광고[footnote]역주: 광고 마지막 남자의 대사. "당신들 이 램프에게 미안해 하죠. 그래서 당신들이 미쳤단 겁니다. 램프한테는 감정도 없는 데다, 새 것이 훨씬 낫죠."[/footnote]가 램프에게 동정을 느낀 우리를 조롱한 것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우리는 60초의 짧은 광고에게 당한 게 아니라, 20시간을 바치며 이 매체의 한계에 동정을 가졌다가 조롱을 당한 것이다. 이 줄거리의 '뒤틀림'은 우리가 플레이어로서 받아들기로 한 스토리의 약점 위에 세워진 데우스 엑스 마키나[footnote]역주: 라틴어 deus ex machina. 기계로 만든 신. 과거 극에서 갈등이 고조되다 무대 위에서 기계장치로 만든 신이 내려와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꼭 신이 아니더라도 별 다른 개연성 없이 이야기의 갈등이 해결되게 하는 장치를 가리킨다.[/footnote]이다. 매체의 약점을 받아들인 것을 조롱하는 것은 플레이어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진정 '터무니 없는'(코미디나 메타 요소로서가 아니라) 것이기도 하다.

위의 비평이 거칠고, 또 복잡한 논증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인정한다. 그러니 몇 가지를 분명히 해보겠다.

먼저,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그랬다면 나는 대체로 흥미로운 능력이나 재미 있는 무기, 아름다운 환경, 적의 '생태계', 선택의 자유, 탐험의 개방성 등 환상적인 것들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플레이어가 이 게임을 플레이 해야 하는 이유나 즐기게 될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게임의 짜임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게임의 성질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내가 게임에 깊이 빠져들어 그 시스템과 콘텐츠에 표현된 것을 진정으로 경험하며 본(혹은 느낀) 약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내가 가리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겐 사소하거나 괴상해 보일 수도 있다. 논점을 위해 세운 논증이 분명 복잡하긴 하다. 나는 그것이 많은 게임 개발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문외한에겐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정직하게, 나는 《바이오쇼크》를 가능한 철저하게 플레이했을 때 내가 경험했던 것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고, 솔직히 내가 쓰면서 말하는 것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게임의 언어'가 그 자체로 제한적이어서,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또렷하게 표현하는 것은 크고 작은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이 비평을 가치를 느끼는 만큼 받아들이라. 반쪽짜리 지식을 가진 술취한 네안데르탈인이, 팔이 하나인 이집트인 석공의 상형문자를 이해하려는 중에 나온 불평이다.

게임은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로저 에버트(Roger Ebert)[footnote]역주: 미국의 영화 평론가. 영화 평론가로서 최초로 퓰리쳐 상을 받을 정도로 미국에서 평론가로서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을 바탕으로 한 영화 《둠》(Doom)에 대해 "게임은 영화 같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해 게이머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난 바 있다. "게임은 예술인가"에 대해 논쟁할 때 꼭 한 번씩 언급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기도.[/footnote]의 논점에 대한 내 반박에서, 나는 《GTA: 샌 안드레아스》(GTA: San Andreas)가 《크래쉬》(Crash)[footnote]역주: 폴 해기스 감독에, 돈 치들, 산드라 블록, 맷 딜런 등이 출연한 영화. 인종충돌이 잦은 LA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종,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 함께 하는 삶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2006년 오스카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footnote]보다 더 중요한 작품이었다고 단언했었다. 지금 나는 《바이오쇼크》가 예술작품이라고 공언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와 게임을 비교할 때 자주 사용되는..."아직 게임에 《시민 케인》(Citizen Kane)[footnote]역주: 오슨 웰즈 감독의 1941년 영화로, 다소 과장해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영화로 꼽히기도 한다. 현대영화의 형식과 기법을 완성했다고도 한다.[/footnote]이 없다"라는 말을 지적하겠다. 오슨 웰즈와 앤드류 라이언 사이의 유사점과는 별개로, 《바이오쇼크》는 우리의 《시민 케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플레이해본 어떤 게임보다도 우리가 그 이정표에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바이오쇼크》는 그 곳으로 가려다가 미끄러 넘어졌다. 하지만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만 깊은 족적을 남긴다. 내가 볼 때 《바이오쇼크》의 실수에서 배워 유희와 서사의 테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전체를 완벽히 실현한 새로운 세대의 게임을 보는 데는 몇 년이 걸릴 것 같다. 새로운 세대의 게임은, 《바이오쇼크》가 《시스템 쇼크 2》에서 나왔듯이, 《바이오쇼크》에서 나온 어떤 것이 아마 우리의 《시민 케인》이 될 것이다.

댓글 2개:

리넨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전 바이오 쇼크를 직접플레이 해보진 않았지만 옆에서 하는 걸 구경했는데 그 커다란 반전이 나오는 부분을 맞닿았을 때의 느낌이 글에서 말하는 것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커뮤니티를 보면 그 부분에 대한 칭찬밖에 없는 것에 좀 의아해했었는데 같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끼네요.

밝은해 :

@리넨 - 2010/01/26 14:44
저는 그 순간, 띠이잉 하고, 개발자가 날 조롱한 건지, 게임 속 캐릭터가 날 조롱한 건지 헷갈리더군요. 그런데 객관주의자에 반대하는 쪽으로 플레이를 해서 그런지, 호킹처럼 모욕감까진 들진 않았어요. 엔딩까지 마음에 들어서 전반적인 플레이 감상은 괜찮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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