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4일

말 없는 게임 디자인 2부: 투쟁과 구조, 내생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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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 "말 없는 게임 디자인" 세 부중 두 번째를 올립니다. 오늘은 게임의 구성요소로 '투쟁'과 '구조', '내생되는 의미'를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세 부를 모두 소개한 후에는 출력이나 휴대기기에서의 독서에 용이하도록 PDF판과 ePub판을 배포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블로그에 소개하는 동안 오타나 오역, 잘못된 정보나 표현이 있을 경우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수자 세 분(칼리토님, lovol님, 하이얼레인님)께서 잘 살펴봐주셨지만 결국 최종적인 모습은 미숙한 제 손 끝에서 나오니까요 :)


투쟁 (struggle)

이따금 정치적으로 올바르단 사람들이 게임이 ‘경쟁적’이라서 나쁘다고 비난한다. 게임엔 승자가 있다. 패자도 있다. 이건 나쁘다. 우린 타인을 지지하고 이끌어줘야 한다. 협동적인 게임은 왜 없나?

그들이 말하는 ‘협동 게임’이란 마치 ‘서로 공 돌리고 놀기’ 같은 뉘앙스다. 아이고야. 얼마나 재밌나. 이제 데스매치 상대를 처박는 일은 관둬야지. 진짜로.

그런데 우리가 정말 경쟁을 말하는 걸까?

아니다. 우린 투쟁을 말한다.

여기 게임이 하나 있다. ‘용감한 소 잉글랜드’(Plucky Little England)라고 하자. 2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가 무너지고 대영제국이 직면한 상황을 모사한 것이다. 당신의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고 암흑과 압제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이다. 선택이 있다.

ㄱ. 항복한다.

ㄴ. 히틀러의 눈에 침을 뱉어라! 브리타니아를 찬송하라! 영국은 노예가 되지 않으리!

뭘 선택할 것인가? ㄴ을 선택했는가? 와, 탁월한 선택이다. 축하한다. 당신이 이겼다! 만족스럽지 않은가? 아, 승리의 전율이여.

물론 승리의 전율 같은 건 없다. 아니, 너무 쉬웠다. 여기에는 어떤 투쟁도 없었다.

경쟁은 게임을 투쟁적으로 만드는 방법의 하나다. 직접 대결을 하는 2인용 게임에서는 상대가 저항이고, 상대에 대해 투쟁한다. 이런 게임은 직접적인 경쟁이고, 투쟁하게 하는 최상의 방법이기도 하다. 작심한 인간 상대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체스가 그런 면에 강한 게임인 것은 모든 수와 생각이 상대의 수와 생각을 예측하고 대응하는 데 좌우되기 때문이다. 체스는 경쟁 외의 투쟁이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게임이다.

하지만, 경쟁만이 투쟁을 일으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소설에서 유추해보자. 다음과 같은 표준적인 이야기 모델이 있다. 주인공에겐 목표가 있다. 그는 장애물 A, B, C, D를 만난다. 그는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투쟁하며 성장한다.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만족스러운 결말을 맞는다.

이 장애물이 꼭 악당, 나쁜 놈, 적수, 원수여야 할까?

잘 만든 악당은 최고의 장애물이긴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자연의 힘과 심술궂은 시어머니, 망가진 하드 드라이브, 주인공 내면의 무력감도 좋은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던전 앤 드래곤》 같은 테이블톱 롤플레잉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여섯 명의 플레이어와 한 명의 게임 마스터와 함께 탁자에 둘러앉는다. 각각의 플레이어는 게임 세계 속에서 하나의 캐릭터만 갖는다. 모두 강해지고 싶어 하고, 대부분 각자 이루고 싶어 하는 다른 목표도 있다. 하지만, RPG의 본질에 따라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상황에서 서로의 목표를 지원하며 협력해야 한다. ‘상대’가 없다. 적어도 그 상대가 다른 플레이어의 형태는 아니다. RPG는 플레이어 간의 직접적인 경쟁이 없다(보물을 나눌 때가 되면 언쟁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D&D에서는 무엇이 투쟁일까? 대체로 몬스터와 NPC들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함께 ‘모험’을 한다. 모험이란 줄거리의 뼈대로, 발생 가능한 조우와 보상의 연속이다. 플레이어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몬스터를 해쳐 보물을 취하고(D&D의 경험 시스템은 이 행동양식에 의존한다.), NPC와 상호작용하고, 줄거리를 파악해서 만족스러운 결과에 도달하고자 한다.

RPG에서 투쟁은 몬스터와 NPC가 만드는 저항, 세계와 이야기의 탐험, 게임의 물리적 세계에 있는 함정이나 퍼즐, 게임의 사회적 영역에 있는 사회적 난제에서 나타난다. 롤플레잉 게임에서 게임마스터는 규칙을 판정하고, NPC의 역할을 하고, 세계를 묘사하고, 플레이어가 만족을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안내할 책임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심판과 극작가를 조합한 역할이다. RPG는 그 자체가 꽤 유연한데다 게임마스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실상 소설만큼이나 다양한 장애물을 놓을 수 있다.

롤플레잉 게임에는 투쟁할 다른 장애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플레이어 상대가 필요 없다. 힘을 얻거나 부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투쟁이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마스터가 제 일을 안 하는 것이다. 게임마스터는 게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상당 부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사건을 투쟁하도록 해서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즐기게 해야 한다.

《그림 판당고》(Grim Fandango) 같은 그래픽 어드벤처에서 투쟁은 경쟁이 아니다. 다른 플레이어도 없고 컴퓨터가 제어하는 ‘상대’와 경쟁하지도 않는다. 그래픽 어드벤처는 본질적으로 퍼즐을 품은 애니메이션 스토리이다. 컷 씬(cut scene)도 있지만 대부분 애니메이션은 플레이어의 행동에 반응하여 엔진 그 자체에 의해 수행된다. 이야기가 완전히 선형적이진 않고, 게임 속 각 지점에서 플레이어는 꽤 넓은 구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캐릭터와 상호작용하고 퍼즐을 풀 수 있다. 어떤 퍼즐은 다른 퍼즐의 풀이에 의존하는데, 어떤 것은 어떤 순서로든 풀 수 있다. 한 구역에서 퍼즐을 다 풀면 플레이어는 게임의 다음 구역으로 이동해 새로운 퍼즐 무리를 만난다.

그래픽 어드벤처는 원한다면 순수하게 스토리 때문에 플레이할 수도 있다. 실지로 어떤 어드벤처는 스토리가 좋아서 이런 방식으로 플레이해도 재미있다(《그림 판당고》가 그렇다). 퍼즐은 밖에서 공략집을 사오거나 웹에 올라온 공략을 받아 풀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즐기면서 퍼즐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제작자는 그냥 퍼즐을 걷어내지 않는 걸까? 왜 그냥 인터랙티브 스토리를 만들지 않는 걸까?

먼저, 30시간의 게임이 네 시간짜리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나는 네 시간의 오락에 50달러를 내고 싶진 않다. 그건 그렇다 쳐도, 퍼즐이 없으면 더는 게임이 아니기도 하다. 더는 어떤 투쟁도 없고, 게임을 해나가는데 아무 노력도 들지 않는다. 퍼즐과 그것을 풀려는 투쟁이 《그림 판당고》를 게임으로 만들어 준다.

컴퓨터와 콘솔 게임 개발자는 꾸준히 이 투쟁의 관념과 씨름하고 있다. 게임이 너무 어려우면 플레이어가 좌절한다. 반대로 너무 쉬우면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개발자들은 꽤 많은 시간을 테스트에 쏟아 주의를 기울여 게임에 알맞은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가능하다면 플레이어 스스로 적합한 난이도를 설정할 수 있게 한다. 스스로 너무 쉬우면 난이도를 올리고, 너무 어려우면 내리는 것이다.

게임 속 플레이어의 목표를 무엇으로 세우든 간에, 디자이너는 플레이어가 그 목표를 이루려 하게끔 해야 한다. 플레이어끼리 서로 대항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플레이어에게 상대가 있더라도 다른 장애물을 넣어서 게임의 풍부함과 정서적 호소력을 늘릴 수 있다.

‘협동 게임’을 바란다는 건 투쟁이 끝나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생존하고 성장하려는 투쟁이다. 무덤 이쪽 편에서 투쟁에 끝은 없다. 투쟁 없는 게임은 죽은 게임이다.

어리둥절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뭔가를 어렵게 만들어야 즐거워진다? 일상의 삶은 그렇게 비취지 않는다. 누군가 내 일을 쉽게 만들어주면 당연히 고맙다. 내 출퇴근 시간이 더 투쟁적이 된다고 해서 더 재미있진 않다. 우리는 투쟁과 일, 장애물을 고통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즐거움이 아니다.

하지만, 게임에 있어선 절대 사실이다. 게임에서 우리는 도전하고 싶어한다. 게임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게임이 너무 쉽고 단순해서 도전 없이 금새 끝을 봐버린다면 전혀 재미가 없다. 너무 쉽게 끝나면 성취감도, 정복감도, 승자의 기쁨도 없다.

그렇다고 너무 힘든 걸 원하지도 않는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계속 태엽을 감듯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면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게임에는 균형[밸런스]이 필요하다. 이 균형은 혼자 하는 게임과 여럿이 하는 게임에서 사뭇 다른 의미다. 여럿이 하는 게임에서 균형은 플레이어들이 모두 공평하고 한 쪽에 치우침이 없다고 느껴야 한다는 의미다. 혼자 하는 게임에서 균형은 플레이어가 열심히 하거나, 더 머리를 굴리고, 게임에 더 숙달할수록 승리의 기회가 커져야 한다는 의미다.

언젠가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치즈와 파테1를 사러 갔었다. 파테를 주문하니 계산대 점원이 내게 코니숑도 살 거냐고 물어봤다. 코니숑은 프랑스 사람들이 파테와 함께 먹는 조그만 피클이다. 그는 팔을 크게 휘저으며, “코니숑 없는 파테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코니숑을 샀다.

자, 투쟁 없는 게임은 있을 수 없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목표를 향해 상호작용하며 투쟁하게 한다.

구조 (structere)

내 친구 에릭 짐머만(Eric Zimmerman)2은 “게임은 욕망의 구조”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먼저, 아주 애매하다. ‘알아듣기’ 전에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 둘째, 게임을 무슨 매음굴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에릭이 이 말로 포착한 것이 있다. ‘욕망’이란 말로 그는 게임에 목표가 있고, 플레이어들이 플레이할 때 자신에게 목표가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데 서로 합의한다는 점을 나타냈다. 게임은 게임 자체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만들어낸다. 구조라는 말로 그는 게임의 규칙과 구성요소, 소프트웨어 등의 상호작용이 그 안에서 사람들이 플레이하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을 나타냈다.

아이들은 상상으로 게임을 고안해내곤 한다. ‘경찰과 강도’ 같은 것 말이다. 내 아이들은 동물로 변할 수 있다던가, 마법으로 19세기에서 현대로 날아온 아이들 인체 하길 좋아한다. 사실 아동기의 ‘가장하기’와 상업용 페이퍼 롤플레잉 게임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플레이어가 가공의 세계 속에서 단일 인물의 역할을 맡는다. 큰 차이라면 ‘가장하기’는 최소한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테이블이나 알고리즘, 마법 규칙, 캐릭터 성장도 공정한 게임마스터도 없다. 줄거리는 있더라도 한순간에 퍼뜩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하기’를 하는 아이들도 어떤 구조가 필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규칙을 고안해낸다. 공원의 오르막 구조물 위로 올라가야만 새로 변신할 수 있다든가. 누군가를 공격하려면 태그를 해야 한다든가. 저기 동상 속에는 적수인 얼음 거인이 살고 있는데, 다가갈 때는 조용히 다가가야 한다든가. 구조도 줄거리처럼 필요할 때마다 고안되지만, 아이들도 이따금 구조가 필요함을 느낀다. 아이들이 만들어낸 구조는 다음번 놀이를 위해 보존되곤 한다. ‘가장하기’는 보통 아이들이 제시된 규칙에 동의하지 못하는 순간 망가진다. (“빵빵, 넌 죽었어.” “아냐, 내가 왜 죽어? 누가 그래?”)

이는 어떤 게임에서나 치명적이다. 우리 모두 같은 것을, 같은 규칙에 따라, 같은 구조 안에서 플레이하고 있다 생각해야 한다.

‘가장하기’가 거의 최소한의 구조로 되어 있는 한편, 철저하게 체계화되어 엄격한 구조로 된 게임 양식도 있다. 가령 보드 전쟁게임(board wargame)이 그렇다.

전쟁게임[워게임]은 육각형 격자가 인쇄된 보드 위에서 플레이한다. 육각형 격자는 체스판의 사각형 격자와 거의 비슷한 역할을 한다. 군사 유닛은 판지로 만든 카운터(counter)3로 표현되어 판의 헥스(hex, 육각형 칸) 위에 놓인다.

전쟁게임의 기본적인 구조 중 하나로 ‘통제구역’(zone of control, ZOC)이 있다. 한 유닛의 통제구역은 유닛을 둘러싼 여섯 개의 헥스로 구성된다.

어떤 전쟁게임은 가두는 통제구역(locking zone of control)을 쓴다. 유닛이 다른 유닛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가둬 버리는’ 통제구역이다. 설명하면 이렇다. 헥스에 당신의 유닛이 하나 있다. 내 차례에 나는 내 유닛을 당신 유닛 옆으로 이동시킨다. 내 유닛은 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다른 헥스로 가지도 못한다. 당신의 통제구역에 ‘갇혔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는 전투를 치른다. 전투 결과로 둘 중 한 유닛이 제거되거나 퇴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린 더는 인접하지 않게 되고, 내 유닛이 살아있다면 다음 차례에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유닛들이 인접해 있는 한은 어느 쪽도 움직일 수 없다.

통제구역에는 다른 형식도 많다. 그 중 멈추는 통제 구역(rigid zone of control)은 약간 다르게 작동한다. 유닛의 구역이 주변의 여섯 헥스라는 기본 개념은 같다. 어떤 유닛이 그 구역에 들어가면 여전히 움직임을 멈춰야 하지만, 다시 움직일 차례가 되면 통제구역을 빠져나와 통제되지 않은 헥스로 갈 수 있다. 통제된 헥스에서 다른 통제된 헥스로 바로 이동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꽤 작은 차이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 차이가 매우 다른 플레이 양식을 만들어 낸다. 가두는 통제구역은 1차 세계 대전 같은 엄격한 전선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유닛이 전선에 투입되면 되돌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멈추는 통제 구역은 더 유연한 2차 세계 대전류의 게임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유닛이 언제든지 철수해서 다른 곳을 공격하는 데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제구역의 종류는 그 밖에도 많다. 나는 십 대였을 때 전쟁게임 출판사인 SPI에서 일했다. 한 번은 당시 SPI의 여러 게임에서 추려낸 규칙들이 담긴 거대한 책을 정리하기도 했다. 게임 디자이너가 다른 전쟁 게임 디자이너들이 전에 어떤 기법을 고안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 중 통제구역이 적어도 열 몇 개가 있었다. 그 용어들이 뭐였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절반 통제구역, 유연한 통제구역…신만이 알 것이다.

그래서? 통제구역은 전쟁게임의 구성요소 중 하나다. 대부분 전쟁게임이 통제구역을 사용했다. 그 외에도 지형 효과 도표와 전투 결과 테이블, 이동 포인트 등 보드 전쟁게임에 특화된 개념들도 대부분 사용했다. 디자이너는 이런 ‘규칙 메커닉’(rule mechanic)을 조합해서 구조를 세운다. 디자이너는 개념적 틀을 세워 게임의 작동을 특징짓고 플레이어의 게임 속 행위를 안내한다. 앞서 두 통제구역의 차이에서 봤듯이 특정한 메커닉의 사소한 차이가 플레이어의 행위에는 커다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보드게임에서 구조는 대부분 글자로 된 규칙에 담긴다(외관은 보드의 위상[位相]에 담겨 있겠지만). 그런 정보는 대부분 말이나 카드, 혹은 다른 구성물에 출력되어 있기 때문에, 보드게임은 플레이어가 그 구조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물론 그걸 이해하는 데는 플레이어 쪽에서 규칙을 배우고 숙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게임(electronic game)은 방식이 다르다. 전자게임은 대체로 그 구조가 소프트웨어의 컴파일된 코드에 담겨 있어 플레이어에게 보이지 않는다. 보드게임의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과 함께 운용하는 책임도 지고 있다. 필요하면 규칙까지 참조해서 플레이어가 직접 계산을 하거나 알고리즘을 적용해야 해야 한다. 전자게임에서 ‘규칙’은 소프트웨어에 통합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경험을 통해 규칙을 이해한다. 그 세부사항에 대해선 무지한 채 ‘직감’으로 그 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구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픽 디자인이 게임 디자인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말하는데, 구조는 그것을 플레이어에게 나타내주는 그래픽 형식과는 독립되는 것이다. 게임플레이 알고리즘과 ‘규칙’, 게임의 행위를 제어하는 수치 자료는 이미지 비트맵이나 3D 모델, 그것을 화면에 표시하는 코드, 플레이어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과는 독립된다.

전자게임의 구조도 보드게임의 규칙과 같은 방식으로 플레이어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까?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렇다. 예를 들어, 《울티마 온라인》과 《에버퀘스트》는 여러 면에서 아주 유사한 게임이다. 둘 다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대규모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게임이자 그래픽 MUD이다. 둘 다 몬스터를 죽여서 캐릭터가 성장한다. 둘 다 캐릭터가 게임에서 가치 있는 것들(무기, 갑옷, 마법 아이템)을 많이 모으는 경향이 있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있다. 《울티마 온라인》에선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를 공격해 죽일 수 있지만, 《에버퀘스트》는 안 된다.

두 게임 모두 몬스터보다는 그와 동등한 힘을 가진 캐릭터가 가치 있는 물건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때문에 《울티마 온라인》에서 가장 빠른 성장 방법은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를 죽여 무기와 갑옷, 마법 아이템을 빼앗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울티마 온라인》은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게임은 혹시 모를 공격에 노심초사하는 자들의 생생한 공포로 가득 차 있다. 반면 《에버퀘스트》에선 플레이어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 돕거나, 지나가던 낯선 이와 말을 나누는 일이 많아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결속을 지니고 행동한다.

《울티마 온라인》도 장점이 있지만, 나는 후자를 더 선호한다. 특히 게임마스터가 플레이어에게 흥미로운 일을 주는데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울티마의 스타일을 더 선호하는 플레이어도 있다.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다른 집단과 함께 하게 되므로, 어떻게 보면 더 효과적으로 가상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어쨌든, 여기서 요점은 구조의 작은 변화가 플레이어의 행위에 큰 차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문학비평에선 흔히 소설의 ‘구조’를 말하는데, 이야기 구조는 게임 구조와는 상당히 다르다. 문학에서 구조의 개념은 관점과 시간의 처리(단일하게 뒤에서 앞으로 이어지는 서사로 이야기하는가, 회상인가, 아니면 시간을 떠도는 관점인가?), 이야기가 긴장을 고조시키고 해소하는 방법에 관계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독자가 바꿀 수 없는 단일한 서사를 만들어 낸다. 서사 구조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경로만을 따라갈 수 있는 일차원이다.

게임 구조는 게임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형성하는 수단에 관계된다. 게임이 플레이어의 행위를 형성한다는 게 결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좋은 게임은 플레이어가 다른 전략과 접근법을 실험해볼 수 있는 상당한 자유를 제공한다. 게임 구조는 플레이어가 ‘게임 공간’4을 통해 가능한 많은 경로를 취할 수 있는 다차원이다.

중요한 건 게임 구조가 어떻게 그리고 왜 플레이어의 행위를 형성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게임 디자인의 기교에 숙달하는 데 이것은 기본이다. 여러 가지 게임 요소를 던져놓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를 결합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전달하고 싶은가를 의식적으로 결정하고,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 점에서 주목할만한 실패의 예로 《울티마 온라인》이 플레이어 간의 대립(‘PK’)을 장려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게리엇(Richard Garriott)은 PK를 장려하면 게임이 더 매력적이게 될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게 플레이어가 《울티마 온라인》에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는 의도적으로 게임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는 과연 PK를 보상해서 장려하고 싶었을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가 이전에 만든 (1인용) 울티마 시리즈는 세심하고 꼼꼼하게 플레이어를 친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길로 안내했다. 게리엇은 게임에 진지한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틀림없이 자기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플레이어 캐릭터 살인의 수준에 진저리를 쳤다.

그럼 그는 왜 살인을 장려하도록 게임을 디자인했을까? 생각하건대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비열한 짓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려는 자유 의지론자의 욕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에버퀘스트》의 PK 금지는 확실히 강압이지만, 잘 굴러간다는 점이 그것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똑같은 효과를 내고자 플레이어의 유인을 구조화하는 데에는 더 정교한 방법도 있다. 먼저 살인자를 추적해 처형하는 강력한 NPC가 있는 큰 정부를 확립할 수도 있다. 아니면 높은 현상금을 걸어 살인자를 찾아 죽이는 것이 살인하는 것보다 보상이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다. 게임의 맥락 속에서 친족이나 공동체로 사람들을 묶어 경찰 없이도 서로 죽이는 걸 방지할 수도 있다.

플레이어의 선의에 따라 자발적으로 질서가 세워질 것이라 가정해선 안 된다. 살인의 보상이 크고 사적인데 반해 선량한 시민 행세에 대한 보상은 적고 눈에 띄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게임의 구조는 경제의 구조와 유사하다. 경제학자는 사람들이 경제적 유인에 반응해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고 가정한다. 꼭 모든 사람이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싶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돈은 경제적 유인의 한 종류일 뿐이다. 순수한 금전적 대가보다 권력이나 명성, 사랑에의 욕구에 더 가치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경제학자는 사람들이 대체로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게임도 똑같다. 대체로, 플레이어는 게임에 제공하는 유인에 반응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항상 그렇진 않다. 플레이어는 때로 별난 일을 하며 기뻐하곤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게임을 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계약은 목표가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플레이어는 목표를 이루려고 구조를 이용할 것이고, 그것은 곧 그 유인에 반응한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경제나 생태계처럼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필요로 행위를 안내하면서도 결과는 정해져 있지 않은 복잡한 상호작용 시스템으로 게임의 구조를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여기서 목표란, 생태계는 에너지, 경제는 돈, 게임은 승리다.

내 식으로 한다면, 게임 디자인을 배우려는 사람은 경제학에 탄탄한 기초가 있어야 한다.

게임은 목표를 향해 플레이어들을 투쟁하게 하는 상호작용 구조이다.

내생되는 의미 (endogenous meaning)

지금까지 내가 꽤 단순한 언어를 썼다는 걸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목표’나 ‘투쟁’ 같은 단어 대신, 1피트 반이나 되는 단어를 허풍으로 만들어 학자들의 구미를 끌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내생’[內生]보다 단순한 용어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생되는 의미. 이게 대체 뭔 의미인가?

사전에 따르면 내생의 정의 중 하나는 “기관이나 체계 속의 인자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그렇다는 거다. 게임의 구조는 그 자체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의미는 구조로부터 생겨난다. 의미는 구조에 의해 야기된다. 구조에 내생되는 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는데 누가 《모노폴리》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100달러를 준다고 하자.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노폴리》의 돈은 실제 세계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걸 준 사람은 십중팔구 괴짜일 거다.

그런데 《모노폴리》를 플레이할 때는 모노폴리 돈에 가치가 있다. 《모노폴리》는 단 한 명을 제외한 다른 플레이어가 모두 파산할 때까지 계속 된다. 《모노폴리》에선 게임에 동봉된 화려한 색의 작은 지폐가 성공과 실패를 정한다. 모노폴리 돈은 《모노폴리》 게임에 내생한다. 《모노폴리》 플레이어에겐 사활을 걸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눈을 판 사이 여동생이 몰래 은행에서 지폐를 슬쩍하지 않나 지켜봐야 할 정도로 중요하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내 《에버퀘스트》 캐릭터가 레벨 7일 때, 나는 게임을 그만두는 사람에게 블러드포지 해머를 받았다. 퀘스트를 통해 스스로 블러드포지 해머를 획득할 수도 있지만, 레벨 7에 그런 퀘스트를 성공한다는 건 가망 없는 일이었다. 블러드포지 해머는 내게 정말 굉장한 무기였고 내 캐릭터를 빠르게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블러드포지 해머는 단지 《에버퀘스트》를 플레이할 때 화면에 묘사되는 3D 모델과 서버에서 처리되는 숫자와 논리값으로 존재할 뿐이다. 현실에 실존하는 표현이 없고 《에버퀘스트》 게임 이외에는 어떤 맥락에서도 가치가 없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원한다면 이베이(eBay)에 가서 블러드포지 해머를 경매를 부쳐 실체적인 돈을 벌 수도 있다. 얼마나 벌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일이다. 《울티마 온라인》과 《에버퀘스트》의 플레이어들은 자주 캐릭터나 소지품, 게임 머니를 경매에 내놓는다. 따라서 누군가는 블러드포지 해머를 진짜 돈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세계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실제 세계의 가치는 오직 《에버퀘스트》의 맥락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에버퀘스트》의 운영사인 베란트(Verant)5가 내일이라도 폐업하고 서버가 닫힌다면, 블러드포지 해머에 대한 내 관념적 소지는 즉시 그 의미를 잃게 되고 아무도 그것에 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자, 이 정도면 ‘게임’의 완전하고 굳건한 정의가 마련된 걸까? 플레이어가 목표를 향해 투쟁하게 하는 내생되는 의미의 상호작용 구조?

정의를 시험하고 싶을 때는 포함하고 싶은 것을 모두 포함하는지, 제외하고 싶은 걸 모두 제외하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다. 그럼, 주식 시장은 게임일까?

주식 시장은 상호작용한다. 당신이 주식을 거래하면 주식의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대체로 그 영향은 아주 미미하지만, 그 주식이 극소량만 거래되거나 당신이 기관 투자자여서 대단히 많은 주를 거래한다면 눈에 띌 만큼 주식을 움직이게 된다.

주식 시장은 분명히 구조를 가진다. 이는 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식 시장의 거래는 분명히 투쟁이다. 많은 투자관리자가 증언하듯 S&P 500 지수를 상회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주식 시장에는 분명히 목표가 있다. ‘플레이어들’은 돈을 벌려고 한다.

하지만, 주식 시장의 의미는 내생적이지 않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은 회사의 지분으로 주식 시장이 내일 당장 증발한대도 의미가 있다. 내일 뉴욕 증권거래소가 사라진다면 내 제너럴 모터스 주식을 팔기 어려워질 것은 사실이다. 주식 시장이 유동성 높고 접근하기 쉬운 시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 시장이 유일한 지분 시장은 아니다. 사람들은 주식 시장에 오르지 않은 비상장 회사의 주식을 사고팔기도 한다. 이는 벤처 캐피탈리스트가 자신들이 자본을 투자한 회사의 소유권을 쪼개며 늘 하는 일이다.

공개상장되지 않은 회사의 주식을 사거나 팔 사람을 찾기는 어렵고, 그 ‘정당한 시장 가치’를 정하기도 어렵다. 그런 회사의 지분을 거래할 지속적이고 유동적인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식은 실제 세계의 가치를 지닌다. 주식은 회사의 지배권 일부와 배당금, 미래의 성장가치를 나타낸다. 주식 시장은 거래를 더 쉽게 만드는 메커니즘이지, 시장을 통해 거래되는 주식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식 시장과 게임의 차이는 논픽션과 픽션의 차이다. 논픽션과 픽션 모두 산문이다. 작문 기법의 많은 부분이 양쪽 모두에 적용되고, (높은 품질의) 논픽션 작문은 픽션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논픽션은 최소한이라도 실제 세계를 다루려 하지만, 픽션은 환상이다.

게임도 환상이다. 게임이 전부 오크와 엘프, 마법의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너무 많은 게임이 그렇지만). 게임이 현실이 아니라는 의미다. 픽션처럼 게임은 스스로 맥락을 제시한다. 소설에서 작가는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 인물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맥락을 제시한다. 소설에 포함되는 많은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끌어온 것이더라도 독자는 그것이 실제 사건의 정밀한 묘사가 아님을 이해할 것을 요구받는다. 대신 이 비현실의 맥락에 빠져들어 가게 되어 묘사된 사건과 인물, 작가가 그것을 묘사하는 솜씨에서 즐거움을 취한다. 간혹 픽션은 일상이 지닌 맥락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바꿔놓는다. 사무엘 R. 델라니(Samuel R. Delaney)가 지적했듯, “그녀의 세계가 폭발했다”(Her world exploded) 라는 구절은 과학 소설과 사실적인 소설, 또 포르노 소설에서 각각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게임도 똑같다. ‘블러드포지 해머’는 《에버퀘스트》의 맥락을 제외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폰’(pawn)이란 단어는 체스가 아니어도 의미는 있지만, 게임의 맥락에서 갖는 특유의 의미와 그 단어의 다른 의미는 독립된 것이다. 로얄 플러시는 포커가 아니면 의미 없는 종이 카드의 모둠일 뿐이다. 《퀘이크》의 데스매치에서 킬을 올린 것은 실제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게임을 플레이할 때 환희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다.

게임과 픽션의 닮은꼴을 너무 과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짚어야겠다. 많은 게임은 실제 세계의 사건을 어느 정도 정확히 묘사하거나 모사하려 한다는 면에서 ‘논픽션’이다.

15년 전, 나는 알버트 A. 노피(Albert A. Nofi)가 디자인한 《임페리엄 로마눔 II》(Imperium Romanum II)라는 게임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적이 있다. 로마 내전을 마리우스와 술라의 대립부터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 수복 시도까지 진지하고 학술적으로 모사하려는 시도였다. 노피의 자료조사와 디테일에의 세심한 주의는 놀라웠다. 나는 플레이어가 관련된 책을 여섯 권 보는 것보다 노피의 게임을 통해 로마 군사와 공화정 후기에서 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변화, 제국 내부 대립의 본질을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경우 게임은 이야기보다 낫다. 선형 서사는 가능성보다 사건의 정확성에 매달려야 하지만, 게임은 시스템을 탐구하고 대안을 실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임페리엄 로마눔 II》는 논픽션 게임이지만, 게임이다. 군단은 현실의 개념이지만, 게임의 맥락 속에서 그것은 수치와 능력을 지닌 잘라낸 판지 카운터다. 로마 도로의 개념은 실제 세계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게임 속에서 그것은 특정 속주6의 헥스에 들어가는 데 이동 포인트를 줄인다. 속주의 개념은 현실이지만, 게임 속에서 속주는 소유한 곳에서 세금 수입이 나오는 헥스 모음이다. 《임페리엄 로마눔 II》는 현실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내생되는 의미를 확립하기 위해 현실의 맥락을 바꾼다.


계속

- 3부: 르블랑의 분류와 결론


주석

1역주: 간이나 자투리 고기 등을 갈아 섞어서 반죽을 입히고 구운 프랑스 요리.

2역주: 게임 디자이너이자 연구자. 케이티 살렌과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게임 디자인 서적 《Rules of Play》을 썼다. 이 책은 ‘게임 디자인 원론’이란 이름으로 2010년 국내에 번역출간(윤형섭과 권용만 옮김, 지코사이언스 펴냄)되었다.

3역주: 주로 전쟁게임에서 유닛이나 게임 요소를 나타내는 판지로 만든 말. 해당 유닛에 대한 상세한 수치나 정보가 출력되어 있다.

4역주: 여기서 ‘공간’이란 게임 속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행동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의미한다.

5역주: 이 글이 쓰일 당시 《에버퀘스트》는 소니에서 분리되어 나온 베란트란 회사가 개발해 서비스하고 있었다. 이후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가 다시 베란트를 흡수하고 게임은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서비스된다.

6역주: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바깥에서 지배한 영토.

댓글 3개:

88black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hah :

잘읽었습니다.좋은자료감사합니다

hah :

3부 포스팅 예정날이 바로 오늘이네요..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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