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6일

말 없는 게임 디자인 3부: 르블랑의 분류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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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게임 디자인" 2002년판 3부 중 마지막입니다.

이 부분에서 코스티키안은 지금까지 밝힌 게임의 구성요소로 만든 정의를 들어 '게임이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론'을 비판하고, 마크 르블랑의 게임 쾌락 분류를 인용해 게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을 설명합니다. 마크 르블랑은 《울티마 언더월드》, 《시스템 쇼크》, 《씨프》 등에 참여한 게임 디자이너로, 이 쾌락 분류 외에도 게임 디자인과 비평을 위한 틀인 MDA 프레임윅을 고안하기도 했습니다. (이 MDA 프레임윅에 대한 논문도 현재 디자인과 플레이에서 번역중입니다.)

ePub판과 PDF판은 블로그에 올리는 동안 받은 지적을 반영해 다음주 월요일에 공개하겠습니다. 그 동안에도 뭔가 잘못된 표현이나 오타, 오역을 발견하신다면 꼭 댓글로 지적해주세요!

그럼, 즐기시길 :)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interactive entertainment)

드디어 우리는 ‘게임’의 기능적 정의를 하나 마련했다. 목표를 향해 플레이어들을 투쟁하게 하는 내생된 의미의 상호작용 구조.

즉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게임’이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하위분류라고 한다면, 우리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이 있을까?

내 답은, “없다.” 혹은 논할 가치가 없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인터넷에는 전혀 게임이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사이트가 얼마든 있다. 하지만, 조사해보면 그것들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인터넷 기술을 이용해 상호작용하지 않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읽을 글이나 볼 비디오, 다운로드할 음악을 제공하는 사이트는 물론 엔터테인먼트다. 하지만, 그 엔터테인먼트와 의미 있게 상호작용하지는 못한다. 인쇄물이나 비디오카세트, CD랑 다를 것이 없다.

“목표를 향해 플레이어들을 투쟁하게 하는 내생되는 의미의 상호작용 구조.” 어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가 이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조적이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단순한 대화(온라인 채팅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가 아니고서야 형식이 없고 구조적이지 않은 엔터테인먼트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즐거움을 준다고 해서 그게 엔터테인먼트인 것은 아니다. 가령 나는 역사를 읽는 것이 즐거워서 역사서를 많이 읽는다. 역사서를 엔터테인먼트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 읽는 것이 즐거울 수 있다. 역사는 외생적 의미를 지닌다. 즐거움은 부수효과지 목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화가 즐거울 수 있지만, 대화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이 되려면 구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내생된 의미가 필요하다. 형식은 그 자체를 맥락화해야 한다. 영화와 음악, 소설 모두 그렇듯 작품 그 자체의 맥락에서 이치에 맞는 의미를 제시해야 한다. 역사나 주식 시장의 경우처럼 그 의미가 실제 세계와 일대일로 직접 닿아있다면 ‘내생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가 실제 세계에 직접 닿아있다면 그건 엔터테인먼트 형식이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다.

게임이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에 투쟁이 없을 수 있을까? 이건 있음 직하다. 아동용 인터랙티브 스토리북 《할머니와 둘이서》(Just Grandma and Me)는 별다른 투쟁이 없다. 아이콘을 클릭하면 자그마한 귀여운 애니메이션이 나와 글을 읽고서 다음 페이지로 간다. 네 살짜리 아이야 이것이 즐겁다. 예전에 보이저(Voyager) 사에서 나온 CD롬 제품들도 성인을 대상으로 같은 것을 만들었다. 뭔가 클릭해서 뭔가 멋진 것을 보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나에게는 정말 따분했다. 그 따분함이 아마 더는 ‘엔터테인먼트 CD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게임을 빼면.

그럼 목표 없는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는 가능할까? 다시 말하지만, 원론적으론 가능하다. 목표 없는 엔터테인먼트 제품은 가능하다. 목표 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란, 상호작용할 이유가 없고, 목표가 없고,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음, 무의미하다.

과학 소설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Theodore Sturgeon)은 문학적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이야기하길 부모님이 거의 모든 아동용 소설에다 《백경》처럼 더 성숙한 작품까지 읽어주었다고 한다. 스터전이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돈으로 당대 최고의 과학 소설 잡지 《어스타운딩 스토리즈》(Astounding Stories)를 사서 집에 가져왔을 때다. 그의 아버지는 잡지를 빼앗고, 반으로 찢어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우리 집은 쓰레기를 이렇게 처리한단다.” 아버지의 말이었다.

사무엘 델라니는 그런 극단의 혐오를 일으키는 문학을 ‘유사문학’(paraliterature)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것을 “글에 대한 극단의 반응”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틀림없이 그날의 어스타운딩이 별로여서 그랬겠지만, 어스타운딩은 40년대와 5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과학 소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중 많은 것이 오늘날에도 출판된다. 과학 소설의 가치에 대해 논쟁을 벌일 사람도 있겠지만, 의심의 여지 없이 몇몇 과학 소설은 진정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게임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를 찾는 것은, 게임이란 읽는 것을 싫어하고 버릇이 없는 꼬마 녀석들의 싸구려에, 저속하고, 폭력적이고, 불쾌하고, 타락한 대중오락물이라고 보는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그런 미숙하고 역겨운 ‘게임’이라는 형식이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뭔가 더 ‘높은’, 큰 가치를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게임이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를 찾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게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게임이 무엇을 대변하는가에 대해 엉뚱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게임 아닌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는 어떤 형태든 상호작용하지 않거나, 엔터테인먼트가 아니거나, 목표가 없을 수밖에 없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로 예술을 이룩할 수 있다.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분야가 성장할수록 풍부한 상상력과 독창성이 담긴 비범한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게임 밖에서 그걸 찾는다면 엄한 곳을 살펴보는 것이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는 게임을 말한다.

르블랑의 분류 (leblanc’s taxonomy)

매력적인 게임을 만드는 데 필요한 통찰을 제시해주는 게임의 기능적인 정의를 마련했다. 목표를 제시하고, 내생되는 의미를 만들며, 구조를 확립하고, 플레이어를 투쟁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게임에 끌리게 하는 게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마크 르블랑(Marc LeBlanc)1의 게임 쾌락의 분류법을 빌려왔다. 그는 여덟 가지 감각적 쾌락(그 중 하나는 감각이다)을 이야기했다.

감각 (sensation)

좋은 비주얼은 감각적 쾌락의 한 형태를 제공한다. 우리는 예쁜 게임을 좋아한다. 음향도 중요하다. 어떤 게임에선 촉각의 쾌락도 중요하다. 게임의 조작이 딱 맞게 느껴지는 것도 중요하다. 스포츠 같은 게임에선 근육의 쾌락 또한 중요하다. 《댄스 댄스 레볼루션》 같은 일본의 아케이드 댄스 게임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순전히 감각이 만들어 내는 차이의 예로 보드게임 《추축군과 연합군》(Axis & Allies)을 생각해보자. 내가 그 게임을 처음 샀던 것은 정체가 분명치 않은 회사 노바 게임즈(Nova Games)가 게임을 출판했을 때였다. 무척이나 화려한 보드에 군사 유닛을 나타내는 추한 판지 카운터가 있었다. 한 번 플레이했다가 형편없어서 관뒀다. 몇 년 뒤, 밀턴 브래들리(Milton Bradley) 사가 그것을 사들여 우아한 새 보드에 항공기, 배, 탱크, 보병의 모양을 한 플라스틱 말 수백 개를 담아 재출판했다. 나는 그 이후로 이 게임을 수도 없이 플레이했다. 보드 위에서 작은 군사들을 움직이는 순수한 촉감의 즐거움이 게임을 하기 재미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인이나 매체 디자인은 게임 디자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이는 게임 제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다. 다른 사람이 게임 하는 모습을 보기에는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 디자인을 각본이나 영화 제작처럼 생각하기 쉽다. 할리우드에서 우리 분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엔터테인먼트를 이해한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적어도 선형적인 시각 엔터테인먼트는 이해하고 있을 테지만, 겉만 아름답고 따분한 게임을 만들기 십상이다.

감각적 쾌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디자인을 할 때 이 점을 생각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뒷받침하는 요인이지, 디자인의 본질은 아니다.

사실상 감각적 쾌락이 빠져 있어도 아름다운 게임일 수 있다. 내가 볼 때 《넷핵》(NetHack)은 역사상 가장 우수한 게임 중 하나다. 나는 여전히 《넷핵》을 플레이하고, 지난 15년간 소유한 모든 컴퓨터에 설치했었다. 게다가 순수한 아스키(ASCII) 그래픽2이다.

판타지 (fantasy)

르블랑의 두 번째 쾌락의 분류는 판타지다. 오크와 엘프, 마법의 세계가 아니라, 픽션에서 말하는 불신의 정지3 개념과 유사한 의미다. 소설이 현대를 배경으로 쇼핑몰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나든, 과거나 미래, 아니면 상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든 간에, 그 속에 정신을 놓을 정도로 재미있는 것처럼 말이다.

체스처럼 추상적인 게임은 이 점이 잘되지 않는다. 그 자체의 내생적 의미 외에는 다른 것과의 접점이 거의 없어 판타지의 매력이 적다. 그렇다고 그게 흠은 아니다. 체스를 시작하면서 컷 씬으로 왜 둘이서 싸우게 되었는지 설명한다고 나아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게임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가 내리는 결정이 어떻게 게임 세계에의 장소감과 몰입감을 유지하게 도와주는지 생각하는 건 중요하다. 적합한 언어를 쓰거나, 설정에 적합한 그래픽 스타일을 이용하거나, 설정의 어떤 측면을 모사하는 듯한 시스템을 이용하는 등 단순한 것들이 모두 게임의 판타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사 (narrative)

게임이 스토리텔링 수단인지 아닌지, 그래야 하는지 아닌지는 빈번한 논쟁의 대상이다. 모든 게임에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이들이 있고, 게임과 이야기는 정반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며, 이야기가 게임에 유용할 수 있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지막 의견 쪽이다. 체스는 전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컷 씬을 넣는다고 나아지지 않겠지만, 이야기 없는 그래픽 어드벤처는 정말 따분할 것이다.

하지만, 르블랑은 ‘서사’로 말 그대로의 이야기를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게임이 극적인 감각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데 가깝다.

학교에서 문학을 배울 때 선생님이 상승에서 절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를 그려주었을 것이다. 이건 게임을 생각할 때도 유용한 방식이다. 게임도 상승에서 절정과 성취감으로 이어지고, 때로는 무수한 긴장의 극치 사이사이로 숨 쉴 틈을 주기도 한다.

이는 《문명》(Civilization) 같은 알고리즘 주도의 게임보다는 그래픽 어드벤처처럼 미리 쓰인 게임에서 이루기 쉽다. 하지만, 《문명》 같은 게임이라도 시간에 따라 상승하는 긴장과 극적인 감각을 조절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가치가 있다.

도전 (challenge)

르블랑의 네 번째 분류는 도전이다. 앞서 살펴본 투쟁의 관념에 대응한다.

앞서 논의했듯이 이는 모든 게임의 핵심이다. 판타지나 서사는 분배하는 것이지만, 도전은 꼭 있어야 한다. 게임을 디자인할 때, 플레이어가 당신의 게임에서 어떤 것을 도전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 도전이 왜 끌리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게임이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지 않도록 (테스트 중에) 도전을 조절해야 한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무선 게임, 일반적으로 말하면 네트워크 게임이 전통적인 게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상자에 담기는 제품이면 보내고 나면 끝이다. 물론 PC 타이틀은 패치를 제공할 수 있지만, 대부분 사용자는 설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게임을 너무 쉽거나 어렵게 만들어놨다고 해도 나중에 바꿀 수 없다. 네트워크 환경에서는 플레이어의 반응을 보고 필요에 따라 게임을 수정할 수 있다.

친교 (fellowship)

르블랑이 말하는 친교의 개념은 온라인 게임에서 커뮤니티라고 부르는 것과 가깝다. 온라인 게임에서 커뮤니티는 그 매력의 중심이다. 심즈 온라인 프로젝트의 수장 고든 왈튼(Gordon Walton)은 “게임 때문에 와서, 커뮤니티 때문에 남는다.”라고 한다. 예를 들어, 1984년에 상업용 온라인 서비스 지니(GEnie)에 런칭되어 지금도 EA.com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에어 워리어》(Air Warrior)를 보자. 이 게임에는 거의 20년 가까이 계속 게임 요금을 내온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요금을 계속 내면서 자신을 “누구누구 대위 퇴역”이라고 해놓는다. 게임 속에서 비행은 하지 않으면서 그냥 채팅방에 와서 동료를 만난다는 의미다.

더 일반적으로 보면, 강렬한 경험을 공유하면 친교가 생긴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스포츠 이야기일 수도 있고, 쇼핑이나 어제 읽은 책, 어제 본 TV 쇼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게이머라면 플레이한 게임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경험을 직접적으로 공유하지 않는 오프라인이라도 공유된 경험은 타인과의 접점을 만들어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발견 (discovery)

발견 역시 많은 게임의 매력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게임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다. 가령 《문명》의 시작 부분에는 아주 정서적인 끌림이 있다. 플레이어의 개척자를 나타내는 작은 네모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거대한 어둠의 세계에 둘러싸여 있는 순간이다. 《에버퀘스트》에서 새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흥분되는 면이 있다. 플레이어는 매 순간 예기치 못한 몬스터의 위협을 경계하며 머뭇머뭇 회랑과 동굴을 탐험한다.

하지만, 발견은 숨겨진 정보가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포커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카드가 무엇일지 알아내려 하거나, 딜러가 나누어주는 카드가 플러시를 완성할 것인가 생각하며 입술을 물어뜯는 순간이다.

순전히 게임 공간이 다양한 결과일 수도 있다.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이 좋은 예다. 매직 카드의 종류가 하도 많아서, 항상 전에 보지 못한 카드와 만나고, 친숙한 카드가 예기치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구성된 덱을 상대할 수도 있다.

표현 (expression)

이것으로 르블랑은 ‘자기표현’을 의미했다. 어떤 게임은 플레이어에에게 게임의 맥락에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낼까 선택해 자기를 표현할 수단을 준다.

예를 들면, 테이블톱 RPG와 MUD, MMORPG에서는 이것이 자명하다. 우린 우리가 선택한 이름으로, 어쩌면 우리가 선택한 의상을 입고,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게임에선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주된 이유인 경우가 많다.

고전 게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트와 포커를 그렇게 많이 하는 건 게임 자체를 경험하는 것보다는 타인과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키 위해서다. 테이블토크(tabletalk)4는 플레이만큼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솔로플레이 게임에서도 그렇다. 《데이어스 엑스》(Deus Ex)에서 플레이어는 폭력배처럼 방해되는 걸 모두 쏴서 이길 수도 있고, 잠입하고 NPC를 설득해서 도움을 얻는 등 총을 피하는 방법으로 이길 수도 있다. 《블랙 앤 화이트》(Black & White)에서는 악이나 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문명》에서는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고, 기술적 우위로 이길 수도 있고, 친구를 만들어 UN의 사무총장으로 당선되어 이길 수도 있다.

간혹 작은 트릭으로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가령 캐릭터의 이름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작은 것만으로도 적당한 자기표현의 수단을 줄 수 있다. 또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Dark Ages of Camelot)에서 플레이어가 돈을 들여 의류나 갑옷을 염색할 수 있게 한 것은 게임 효과는 없지만, 자기표현의 수단을 준다. 실질적으로 캐릭터의 무기나 갑옷에 기꺼이 돈을 쓰듯, 가상의 패션 같은 사소한 것에도 돈을 쓴다.

복종 (masochism)5

이건 단어 선택이 묘해 보이지만, 아주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앞서 우린 실제 삶에서 투쟁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게임에선 그러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마크가 말하려는 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의 구조에 복종하여 얻는 쾌락이 있다는 것이다.

게임의 구조에 복종하는 것은 우리가 플레이할 때 하는 기본적인 계약이다. 실제로는 《모노폴리》 속 돈을 얻든 못 얻든 상관없지만, 게임을 할 때는 얻고 싶은 듯 행동하기로 한다. 실제로는 오늘 《에버퀘스트》에서 레벨업을 할 것인가는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게임을 할 때는 미치도록 레벨을 올리고 싶어 한다. 실제로는 양키스가 자이언츠를 이길까는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음, 뭐, 신경 쓸 것이다.

그 계약을 하지 않은 사람, 게임의 구조에 복종하지 않은 사람과 노는 것은 무척이나 괴롭다. 가만히 서서 채팅 창에 퉁명스런 말이나 날리는 사람과 《퀘이크》를 하는 건 재미가 없다. 스트라테고(Stratego)를 할 때 여동생이 말을 아무렇게나 놓는다면 내가 밀어붙이고 있어도 재미가 없다.

속임수를 쓰는 사람과 하는 것도 당연히 괴로운 일이다. 그들은 구조를 어기면서 게임의 목표를 추구한다.

구조를 알아내고, 어떻게 이길까를 궁리하며, 그걸 활용해 상대를 이기거나 게임세계에서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바로 게임플레이다.

예술가들

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이라는 매체로 작업하는 예술가이다. 예술가는 모방으로 시작한다. 만화 그림작가가 되고 싶으면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그리거나 헤르난데즈 형제6처럼 그리며 시작한다. 록 뮤지션이 되고 싶으면 동경하는 기타리스트의 스타일을 따라 한다. 작가라면 팬픽을 쓰거나 좋아하는 작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며 시작한다. 게임 디자이너라면, 즐겼던 게임과 비슷한 게임을 디자인하며 시작한다.

그리고서 기교에 숙달하기 시작한다. 숙달된 기교를 이용하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한다. 롤플레잉 게임의 이런 측면을 실시간 전략 게임에 가져온다든지, 판타지의 감각을 어떻게 더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든지, 정립된 게임 양식에 기발한 설정을 취한다든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술가는 의도를 두고 작업한다. 예술가가 매체를 완전히 이해하면 기존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향상시키려 하지 않는다.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원했던 효과를 품고 어떤 기교가 그런 효과에 적합한지 이해하며 각각의 모든 측면이 바라는 목표를 뒷받침하는 작품을 완성하려 한다.

이 분야, 그리고 어느 분야든 의도를 가지고 작업해서 결과적으로 정제되고 혁신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는 단계까지 도달한 대가는 소수이다.

무엇이 게임을 게임으로 만드는가?

게임을 디자인하거나 플레이하면서 그 매력을 이해하려 할 때, 이 글에서 내가 논한 도구들(나의 게임에 대한 정의와 마크 르블랑의 게임 쾌락의 분류 모두)로 시작하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플레이어가 게임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그 상호작용에 의미가 있는가? 상호작용의 과정이 즐거운가, 아니면 따분한가. 따분하다면 어떻게 덜 따분하게 만들 수 있을까?

게임은 어떤 목표를 뒷받침하는가? 승리 조건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플레이스타일을 뒷받침하고, 그에 따라 어떤 종류의 목표를 허락할 것인가?

게임을 다스리는 알고리즘이 디자이너가 게임으로 하려 했던 것을 뒷받침하는가? 그것이 게임 세계의 맥락과 떠받치려는 판타지에 ‘맞게 느껴지는가?’ 알고리즘이 플레이어에게 어려운 선택을 지울 정도로 복잡한가? 아니면 플레이어가 게임에 매혹되지 못할 정도로 단순한가?

투쟁은 어디에 있는가? 플레이어는 어떤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가? 게임이 대안이나 보조하는 문제로 풍성해지는가? 게임이 너무 어렵거나 쉬운가?

게임이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 그 의미는 플레이어가 자신의 행동을 신경 쓰게 만드는가? 게임 오브젝트와 실제 세계 사이에 접점이 존재하는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어떤 통찰을 받는가?

그것이 어떤 쾌락을 제공하는가?

게임이 어떤 쾌락을 제공하는가?

비주얼은 게임의 주제와 접근법에 꼭 들어맞는가?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가? 음성 연기는 괜찮은가? 대사를 쓰는 데 전문 작가를 고용해야 하는가? 음악은 훌륭한가, 아니면 15분 뒤에 플레이어가 질리기 시작하는가? 조작은 맞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사람들이 무슨 버튼이 뭐였는지 잊어버리는가? 아니면 손목 관절 증후군을 유발하는가?

게임의 배경이 웅장하고 영웅적인 판타지 같은가? 처음으로 톨킨을 읽었을 때처럼 조마조마하게 하는가, 아니면 서투르고 전형적인 오크와 엘프인가? 일상의 교외도시를 배경으로 한 친근함이 플레이어가 인물에 관심을 두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어색한가? 플레이어가 바나나 공화국의 독재군주가 된 것 마냥 스페인 억양을 흉내 내게 하는가, 아니면 무슨 공상의 군대를 움직이는 듯 게임과 접점을 찾을 수 없게 되는가? 게임은 어떤 판타지를 제공하는가? 게임의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판타지를 느끼도록 하는가?

게임에 이야기가 있다면, 정서적으로 만족을 주는가? 게임에 극적인 전개가 느껴지는가? 아니면 막판에 승리를 따내려고 마지막 몇 번의 장애물에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플레이어의 심장을 뛰게 한다면, 왜 그런가? ‘절대’ 그렇지 못한다면 플레이어를 매료시키고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게임의 도전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너무 쉬운가, 아니면 너무 어려운가?

게임이 플레이어와 접점을 만드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게 하지 못하는가? 어떻게 게임 속에 동료의식, 공유된 경험, 공동체의 감각을 만들고 유지할 것인가? 게임 주변으로 지속적인 참여의 감각을 형성할 구조(리차드 가필드의 메타게임7의 관념)가 있는가? 게임의 사교적 장점은 무엇인가?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어떻게 무언가를 발견하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나는가? 게임이 진행되면서 충분한 변화와 진기함의 감각이 있는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도 봤던 걸 또 보게 되는가? 게임 공간의 탐험을 어떻게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가?

게임은 어떤 자기표현의 기회를 제공하는가? 플레이어가 오용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런 기회를 더 제공할 수 있는가?

게임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게 재미있게 느껴지는가? 아니면 테스터가 그런 제약을 싫어하던가? 무엇이 게임을 제멋대로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가? 그것을 게임의 미학과 세계관이 자연스레 나타난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는가? “젠장,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게 있는가? 플레이어가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마지막 인용구

마지막으로 칼 융의 말 한 구절을 남기고 싶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멸시하더라도, 게임을 발명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8

밖에서 보면 게임 디자인은 쉬워 보인다. 밖에서 보면 작문도 쉬워 보인다. 할리우드에선 모두 각본에 손대고 싶어 한다. 그런데 사실 게임 디자인은 창작 계통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방법과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사용하게 될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게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예술 형식이다. 그 산물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게임은 마지막 붓칠이나 모든 쉼표까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대신 게임은 플레이 됨으로써 개발자와 플레이어 사이의 협동이자 상호 발견의 여정, 민주적 예술 형식이 된다. 게임의 꼴은 예술가가 만들지만, 게임의 경험은 플레이어가 만든다. 따라서 게임 디자인은 플레이어가 게임으로 가질 경험을 상상하고, 그 상상을 통해서, 플레이어가 느껴 주었으면 하는 경험을 지향한 구조를 만드는 창조적 시도이다.

사실, 게임 디자인은 그저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불가능하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면,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게임을 구체적으로 결정한다거나 플레이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이 나온 순간부터 아름답고 놀랍게 작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챙겨야 할 것이 너무 많고, 실패로 가는 길은 널려 있다. 게임 디자인은 결국 예산과 일정, 경영진이 허락하는 한에서 진정으로 아름답고 놀랍게 작동하는 완성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정제하고, 테스트 동안에는 지속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플레이어가 어떤 경험을 가지게 하고 싶은지 생각하고, 무엇이 게임을 만드는지 이해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어떤 쾌락을 찾을지 이해한다면, 아름답고 놀라운 게임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변화는 더 숭고할 것이다.

주석

1역주: 《울티마 언더월드》, 《시스템 쇼크》, 《씨프》 등에 참여한 게임 디자이너. 이 쾌락 분류 외에도 게임 디자인과 비평을 위한 형식적 틀인 MDA 프레임워크를 고안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2역주: 컴퓨터와 통신 장비 상의 문자 인코딩 표준인 ASCII로 출력할 수 있는 문자만을 활용해 시각정보를 표현한 그래픽.

3역주: suspension of disbelief. 시인이자 미학자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이름붙인 개념이다. 환상을 다룬 이야기라도 인간적 흥미와 진실의 모습이 있으면, 사실이 아니라는 불신을 중지하고 작품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4역주: 포커나 하트에서 플레이어끼리 하는 의사소통. 상대가 알지 못하는 수단으로 파트너에게 자신의 카드를 알려주거나 상대 플레이어를 교란, 혹은 간파하는 데 이용한다.

5역주: masochism(피학대 성애)이 지닌 성적인 의미 때문인지, 르블랑은 이후 이것을 이후 submission으로 바꾸었다. 여기서도 submission을 따라 ‘복종’으로 번역했다.

6역주: 제이미, 길버트, 마리오 헤르난데즈의 형제 만화가. 1981년작 《러브 앤 로켓》이 대표작.

7역주: 리차드 가필드는 《매직 더 게더링》의 디자이너로, 2000년 GDC에서 ‘메타게임’(metagame)이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이는 어떤 게임이든 똑같은 규칙이라도 다른 사람에겐 다른 의미일 수 있음을 표현한 개념이다. 가필드는 메타게임을 ‘플레이어가 게임에 가져오는 것’,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취하는 것’, ‘게임 사이에 일어나는 일’, ‘게임 도중 일어나는 일’로 나누었다. 발표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http://www.gamasutra.com/gdcarchive/2000/garfield.doc)

8역주: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친구이자 작가인 로렌드 반 데 포스트가 융에 대해 쓴 책 《Jung and the Story of Our Time》에서 인용된 것이다. 게임 개발자나 연구자들이 제법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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