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데이트(04/30): Maaike Lauwaert의 이름 Maaike의 표기를 마이케에서 마이커로 바꿨습니다. 네덜란드어 이름인데, e가 어말에 오면 '에'가 아닌 '어'로 표기해야 한다는군요.
테일 오브 테일즈가 진행한 게임계 인사와의 인터뷰 시리즈, 이번에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연구를 하는 젊은 게임 연구자 마이커 라우아르트(Maaike Lauwaert)입니다.
이 인터뷰는 여러 모로 앞서 공개한 셀리아 피어스와의 인터뷰가 떠오릅니다. 피어스는 기존의 지배적인 게임 담론을 게임계에 깊숙이 박힌 성 편향적 사회구조와 자기충족적 예언이라 비판하고, 목표 지향적이고 구조화된 게임보단 플레이어의 자발성을 지지했는데요. 라우아르트는 주류 게임이 소비주의를 강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게임 속 플레이어의 자유와 디자이너의 작가적 이상의 대립을 이야기합니다.
테일 오브 테일즈 인터뷰 시리즈 전반이 테일 오브 테일즈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인물의 생각듣기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과의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비슷한 주제가 나와도 별로 이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디자인과 플레이도 그런 방향을 한 축으로 삼고 있죠 :) 이후에 번역할 인터뷰에는 테일 오브 테일즈와 반대 생각을 가진 인물과의 인터뷰가 있으니 기대해주시길…
2007년 7월
원문보기 (영어)
☞ 그간의 테일 오브 테일즈 인터뷰 번역: 아메리칸 맥기, 셀리아 피어스, 제노바 첸
나는 마이커 라우아르트(Maaike Lauwaert)를 우리의 첫 게임 프로젝트 《8》의 열성적인 테스터로 기억한다. 게임은 버그로 그득했고 내비게이션 시스템은 절반만 작동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을 세심하게 탐험하며 우리 게임이 지닌 갖가지 모습을 발견해냈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방식이 다양함을 완전히 깨닫게 된 게 그때였다. 폭력적이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며, 경쟁하지 않는 형식, 우리가 만들고 싶어하는 놀이를 원하는 대중이 있을 거라는 것도.
이후, 마이커는 많은 게임 연구자가 감히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한다. 그는 (호이징가와 카이요와, 서튼스미스 성 삼위일체 중 한 명인) 로제 카이요와의 이론에 공공연히 도전해, 그것이 컴퓨터 게임을 완전히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친숙한 '경쟁, 우연, 현기증, 모의' 옆에 발견과 서사, 진전을 컴퓨터 게임의 중대한 요소로 압축하는 '제5의 차원'[PDF 파일]을 더했다.
그는 게임에 대해 고유의 시각을 발전시켜왔다. 그 시각은 그가 때로 대부분이 무해하다고 간주하는 게임을 비난하게 하고, 언뜻 보기엔 놀랍지만 결국에는 이치에 닿는 개념을 수용하게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뒤틀림과 전망의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규칙과 보상, 자본주의
테일 오브 테일즈(ToT): 많은 개발자와 학자들은 게임이 규칙 기반의 경쟁적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게임에서 경험하는 재미는 도전을 극복한 결과라고 하죠. 동의하나요?
마이커 라우아르트(ML): 물론 동의하죠. 하지만, 그런 규칙 기반의 경쟁적 시스템 게임이 시장에서 지배적인 장르라서 동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충족적 예언인 거죠. 만약 경쟁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규칙 기반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게임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도 즐기겠죠(《괴혼》처럼). 게임이 꼭 도전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즐겁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플레이어들, 게이머들은 임무와 재현, 도전, ‘승리’를 바탕으로 한 놀이 시스템을 바라도록 단련되어 있죠.
ToT: 어떤 이들은 게임의 도전/보상 구조가 게임을 극적이고 예술적으로 만드는 데 필수인 대립의 표현이라고 주장하죠. 이건 동의하시나요?
ML: 아뇨. 전 그게 게임보다 더 큰 문화 구조, 그러니까 '학교나 직장이 끝난 뒤 달콤한 캔디를 주는' 경제적 보상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지배적인 게임 시스템에 대한 해석은 그 게임 세계 속만이 아니라 바깥, 컴퓨터 게임의 더 큰 문화적 맥락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대의 성공한 컴퓨터 게임은 그 도전과 보상 구조, 그리고 수집/채집/축적에의 몰두라는 면에서 우리의 후기자본주의적 사회와 문화 양식을 강화하죠. (《괴혼》도 더 큰 공이 좋다는 점에서 그렇죠. 하지만 그 공은 인간의 쓰레기와 파편으로 되어 있어서 과소비에 대한 비평이기도 합니다.)
ToT: 게임에서 규칙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ML: 규칙에는 게임 속 규칙과 프로그래밍 코드 속 규칙(오브젝트 'a'가 행동/행위 'b'로 이어진다) 두 가지 유형이 있어요. 게임 속 규칙이 느슨한 게임(《괴혼》과 《이코》, 그리고 당신들이 만드는 것)은 있지만, 코딩 수준에서 느슨한 것은 거의 없죠.
ToT: 그 프로그래밍 규칙의 많은 부분은 가상 환경을 그럴듯하게 하려고(오브젝트 'a'로 오브젝트 'b'를 치면 엎어진다) 만들어지는데요. 코딩 수준에서 느슨하다는 건 초현실주의를 말하는 건가요?
ML: 저는 게임에서 일정한 초현실주의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거로 생각해요. 주류 게임은 '악동'이나 '조숙한 아이' 이미지를 조성하면서도 너무 관습적이어서, 놀이의 실제에서 주류 게임은 진짜로 도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면이 없죠. 주류 게임은 플레이어가 선 바깥에 그림을 그리지 않도록 하고, 대부분 플레이어는 고분고분 선 안에 그림을 그립니다.
유머와 권력
ToT: 그 점에서 특히 밀리터리 게임의 인기가 떠오르네요. 그런 게임은 보통 상관이 하라는 대로 하죠. 그 재미란 들은 대로 하는 거고요. 이것이 이런 게임을 하는 청소년들에게 일정한 행동을 훈련하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게임 디자이너가 자신의 게임이, 음, 권력의 프로파간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ML: 이 점에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 쪽은 그런 것에 도전하기 보다는 팔리는 게임을 만드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고요. 다른 한 쪽은 많은 밀리터리 게이머가 더더욱 사실적인 걸 추구하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기존의 권력 양식과 행동 방식을 강화해야 하는 거죠. 미군이 게임 회사에게 당신네 게임을 훈련 자료로 쓰고 싶다고 하면 커다란 찬사일 테죠.
ToT: 군사적 구조의 게임이 성공하는 걸 보면, 단순히 사람들이 규칙에 복종하길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ML: 저는 무작위적이거나 변화에 유연한 인과 시스템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도 많다고 생각해요. 《심즈》에서 유아용 침대에서 방귀를 뀐 심을 두고 유저 사이트에 "내 심이 방금 뭘 했는지 알아요?" 같은 글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세요.
ToT: 그렇네요. 그런데 특정 유형의 서사만이 그런 종류의 플레이에 적합하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말하는데 캐릭터가 유아용 침대에서 방귀를 뀌는 걸 가능하게 할 수 없잖아요.
ML: 알아요. 슬픈 건 《심즈》의 이런 '익살스런 변덕' 대부분이 사실 모두 프로그램되었다는 거죠. 한 사람이 이 기묘한 현상을 알리면, 다른 열 사람도 똑같은 걸 경험했다고 말해주죠.
ToT: 유머스러운 게 게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나요?
ML: 아뇨. 그리고 대부분 게임이 익살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는 《심즈》가 익살스럽진 않았어요. 게임에선 유머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가령 농담에는 펀치라인이 필요한데, 그건 대부분 플레이어가 개입할 수 없는 영상에서 일어나죠(《메탈 기어 솔리드》의 그 끔찍한 보스전에서 "이 모든 게 다 게임이라고 생각하나?" 같은 대사).
장난감, 게임, 그리고 예술적 이상
ToT: 디지털과 논디지털 게임에 차이가 있을까요?
논디지털 게임이 주지 못 하는 걸 디지털 게임이 줄까요?
ML: 아마도요.
아마 저는 장난감을 실제로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장난감 자체에 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장난감 자체에서 차이가 비롯된다는 겁니다. 디지털 장난감과 컴퓨터 게임은 아날로그/기계 장난감과는 다른 놀이와 게임 기회를 제시하죠. 디지털 놀이에서 놀이의 영역이 넓어지는 특징이 그 차이를 나타내죠. 디지털의 놀이 현장은 더 다채롭고 크면서 플레이어가 현장에 보탤 수 있는 선택권이 더 많습니다. 또 채팅 사이트나 팬사이트 같은 것처럼 놀이의 '바깥둘레'에서 많은 활동이 일어나죠.
반면, 플레이어가 게임의 '내용'을 결정할 기회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이건 또 주류 게임산업이 컴퓨터 게임의 규칙 기반 프로그래밍 코드를 개방하거나 완화하길 꺼리게 하죠(가령, 《심즈》에선 환경주의 가족으로 살기가 어렵죠. 소비주의적 방식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논디지털과 디지털 놀이의 차이는 사람이 플레이하는 대상이 무엇이냐 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건 놀이의 실제와 현장에 차이를 만듭니다.
ToT: 하지만 그게 디지털 게임이 예술형식으로서 장난감과 구분되는 점은 아니지 않나요?
플레이어가 콘텐츠를 만들 기회를 줄이는 걸 작가의 작업으로 볼 수도 있죠. 만약 보르헤스가 알렙(The Aleph)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알파벳 순으로 나열한 목록을 발표했다면 독자에겐 많은 자유가 주어졌겠죠. 이 자유를 포기하는 데서 뭔가 얻는 게 분명 가능합니다.
ML: 맞아요. 좋은 지적입니다. 저도 동의해요. 문제는 그걸 대표하는 게임을 찾기 어렵다는 거죠. 가능성을 줄여서 보르헤스 같은 놀이 경험을 한다면 대단하겠지만(또 진짜 기괴하겠고), 기성 게임은 하나의 이상(vision)이 아니라 돈/전문기술/마케팅 연구/팀 멤버 등이 타협한 결과입니다. 이상이 없는 게임은 최악이죠.
그래서 제가 당신들 작업을 좋아해요. 타협이 아니라 이상이 있잖아요. (물론 누구든 돈과 기술 같은 데서 타협을 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요.)
컴퓨터 게임의 즐거움과 소비자 만족의 위험
ToT: 당신은 아날로그 '장난감'과 디지털 '게임'을 비교하는 것 같은데요. 아날로그 게임(보드 게임과 아이들 게임 같은)은 어떤가요? 컴퓨터 게임이 그저 아날로그 게임이 진화한 거라고 주장하는 개발자들도 많은데요. 그런데 디지털 게임이 이상할 정도로 성공한 걸 보면, 뭔가 새롭고, 사람들이 오래된 게임에서 얻지 못 한 것을 제시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뭘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ML: 아날로그 게임과 디지털 게임, 그리고 후자의 성공을 비교한다면, 저는 그 이유가 복합적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컴퓨터 게임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씀 드리죠.
-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날로그 게임에는 다른 플레이어가 필요하죠.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에게 같이 클루도(Cluedo) 하자고 조르려면 엄청 오래 걸려요. 컴퓨터 게임은 외로움을 느낄 필요 없이 혼자 쉽게 즐길 수 있습니다.
- 고도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은 즐거움이 계속되도록 디자인됩니다. 클루도는 여섯 라운드를 지나면 뭔가 다른 걸 하고 싶어지는데, 컴퓨터 게임은 따로 카트리지나 CD를 바꾸지 않아도 항상 뭔가 다른 걸 하게 되죠. 새로운 레벨, 새로운 세계, 새로운 미션, 새로운 물건, 새로운 스킬, 이 모든 게 플레이어를 계속 즐겁고 바쁘도록 하면서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고 알려줍니다. 보고, 하고, 탐험하고, 모을 것이 더 있다고요. 그리고 단 하나의 게임 속에서 서로 다른 형식/방식의 놀이(경쟁, 서사, 몰두, 동일시, ...)를 조합합니다. 게임을 더욱 더 유쾌하고 즐겁게 하지요.
- 또, 당근과 채찍 방식이 게임을 아주 중독적이게 합니다. 자본주의가 성공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노력과 승리의 진폭을 바탕으로 한 컴퓨터 게임은 중독적입니다. 우리는 보스와 싸우고 보상으로 잘 빠진 새 무기를 얻는 빠른 페이스에 익숙해졌죠. 제가 이런 게임 구조와 그 의미, 기원을 경계하긴 하지만, 성공한 공식인 건 사실입니다.
- 시각적으로 광대해요. 보고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계속 플레이하고 싶게 되죠.
- 우린 기술을 사랑하고, 기술과 놀길 좋아합니다. 그 매끈하고 매혹적인 기계들에 비하면...보드 게임은 구식에, 따분하고, 느리고, 번거로워 보이죠.
ToT: 당신이 게임 구조를 경계하는 점에 대해 조금 설명해줄 수 있나요?
ML: 저는 게임에서 몇 단계 진행할 때마다 잘 빠진 새 무기나 관능적인 헬멧이 필요하진 않아요. 그보단 낯선 경험을 하고 싶죠. 《엔들리스 포레스트》에서 '내' 뿔에 꽃이 핀 것처럼요! 그거 정말 허를 찔린데다 너무 행복했어요!!! '투쟁' > '성공' > '보상'이 끝없이 계속되고 수없이 시도해야 성공하도록 프로그램된 게임보단 기묘한 만남이 좋아요. '손가락을 좀 더 빨리 꼬아보라는' 마지막 도전을 좋아하질 않아서 어떤 게임이든 끝낸 게 드물어요. 《데굴데굴 쫀득쫀득 괴혼》도 세계를 굴리는 부분 때문에 못 끝냈어요.
일반적으로 볼 때, 게임과 구조가 그 플레이를 통해 내재화하는 것이 채찍과 당근 방식을 바탕으로 하는 한, 소비 만족에 덜 집착하는 세대를 기르는 건 이전 세대보다 더 힘들어질 겁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시작에서 그들은 소비자 문화 속에서 아이들이 성공적인 소비자가 되도록 훈련하는 것의 교육적 이점을 분명히 봤습니다.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새로웠죠. 오늘날 게임 회사들이 도전하는 건 젊은 세대를 성공적인 소비주의 속에서 훈련하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가 과소비의 영향(개인의 건강과 세계 전반의 건강 양면에서)를 인지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뭐든 '전달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면요. 게임이 그 자체로 훈련 장치라거나 항상 유용하고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제발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소비주의를 찬미하는 후기 자본주의 체계를 투쟁+성공=보상이라는 수준까지 강화하는 게임이 시장과 거실에 흘러 넘친다면, 피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즈와 괴혼
ML: 문화적 비관주의자처럼 말했네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여기서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컴퓨터 게임이 다각화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도전과 보상 구조를 한 게임이 정착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원칙을 바탕으로 한 게임도 대규모로 제작하면 유용하고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요.
ToT: 사람들은 늘 《심즈》가 목표를 스스로 발명하는 열린 세계와 원하는 대로 놀 자유가 있다고 대안으로 제시하는데요. 당신이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압니다.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아버지가 제 때 일을 못 끝내는 아들을 쏘는 게임(《괴혼》)이 더 우월한지도요.
ML: 《심즈》는 교외의 가정이라는 데 맞춰 노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는 면에서 열린 게임이 아니에요. 부자가 되고 싶은 것과 유명해지고 싶은 것 사이에 고를 수 있는데, 그건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인용문을 하나 덧붙여보죠.
“그러나 상호작용 광신자들은 젊은 세대가 '그들만의' 디지털 문화를 구축하는 데 '활발히' 참여하는 정도와 종류를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경로나 캐릭터, 무기를 선택하는 일이 (...) 아주 흥미진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놀이의 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개방성이나 깊이 있는 결정에 대한 선택이 아니다. 게이머의 (...) 행동은 게임 디자이너가 예기하는 방도 중에서 (선택보다는) 선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Kline, S., Dyer-Witheford, N., & De Peuter, G. (2003). Digital play: the interaction of technology, culture, and marketing. Montreal; Ithaca [New York]: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pp. 18-19.
실제로 한 없는 실험과 연출, 창조, 파괴, 재발명의 자유로 놀 수 있다는 게 윌 라이트 게임에 대한 통속적 시선이죠. 라이트의 게임에 대한 거의 모든 리뷰나 매뉴얼은 플레이어가 꿈꾸는 도시나 가정, 관계를 창조할 수 있게 한다고 이야기하죠. 분명 형태의 수준에서는 상당한 자유가 있습니다. 특히 《심시티》와 《심즈》가요. 그럼에도 놀이의 실제는 거의 항상 의도되고 게임 산업이 자본화할 수 있는 틀 안에서 일어납니다.
《괴혼》도 열린 게임은 아니죠. 하지만 그런 척 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건요. 기분 좋게 기묘하고 유쾌하고 천진난만하면서 관습적이거나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고, 아바마마가 왕자를 쏘는 게 그와 나를 동일시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저는 가상의 설거지를 하기보다 지저분한 어린애 방에서 비굴하게 덩어리를 굴리겠어요.
제가 이 게임을 게임 산업의 다양성 면에서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다름'과 관련이 있어요. 《괴혼》은 서양 게임이 아니고 나나 서양 플레이어들에게만 기묘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요.
어쨌든 《괴혼》 역시 성공/보상 구조를 취하는데(가령 왕자 머리에 뭔가 멋진 걸 씌운다던가), 압박이 더 적고 쾌감은 보상 그 자체가 아니라 덩어리를 더욱 더 크게 굴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보상 대부분이 '우발적'이죠(덩어리에 또 다른 괴상한 생물을 굴렸다). 그 보상을 위해 노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최종 보스를 물리치려고 특별한 검이 필요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그냥 지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괴혼》이 주류 컴퓨터 게임과 좋은 의미에서 다르다(적어도 서양 플레이어에게)고 생각하는 이유는요...
- 초현실주의: 내용과 디자인 양쪽에서 (손으로 그린 듯한 캐릭터, 색상...)
- 색다른 감정이 나타남: 가장 눈에 띄는 건 굴욕
- 인간을 소비하는 기계라고 조롱함
- ‘이걸 하기 전에 저걸 먼저 해야 한다’는 구조가 엄격하지 않음
- 보다 단순한 것(덩어리 굴리기)을 매우 재미있게 만듦
작가의 이상과 플레이어의 창조성
ToT: 컴퓨터 게임 대부분의 강제적인 도전/보상 구조의 성공을 볼 때, 요구를 줄인 더 창조적인 형태의 놀이가 얼마나 실현 가능할 거라고 보시나요? 이런 유형의 게임을 할 사람이 있을까요?
ML: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새로운 혁신이나 기존의 혁신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사용자가 주도한다는 걸 보면요. 적절한 커뮤니티 구축과 오픈 소스 정신, 사용자에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구현할 기회가 있다면, 그런 새로운 형태의 놀이가 분명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단순히 시장에 떨어트리는 것만으론 제대로 증명이 안 될 겁니다.
ToT: 앞서 예술적 이상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하면서 디자인을 과도하게 타협하는 걸 비난하셨는데요. 그런데 게임의 내용을 사용자가 책임지게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창조적 타협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건 상당히 재미있겠죠. 하지만 당신은 게임을 더욱 더 장난감의 범주로 밀어넣지 않나요? 게임이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이자 새로운 문화 동력, 21세기의 예술 형식이 되는 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ML: 좋아요, 게임을 이야기할 때 저는 두 가지 생각을 섞어놓는 것 같아요.
- 디자이너의 자취, 분명한 예술적 이상을 지닌 21세기 예술 형식 게임.
- 도전과 보상의 인과 구조를 느슨히 한 창조적인 놀이 게임.
이 둘은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서로 구분될 수도 있죠.
분명한 이상과 함께 분명한 도전/보상 구조를 함께 지닐 수도 있죠. 《이코》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게임이죠. 플레이하기도 재미있지만 게임플레이 면에서도 혁신적입니다. 게임 세계의 디자인과 이야기는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이죠. 이 《스케치파이터 4000 알파》도요. 게임플레이 수준 말고 정말로 독창적인 형태의 수준에서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도전/보상이 아닌 다른 게임플레이 구조인 게임도 있을 수 있죠. 실현하기는 더 어렵지만요. 형태의 수준보다는 게임플레이의 수준에서 혁신을 이루고 싶다면, 이 형태를 구체화하는 데 사용자 제작 콘텐츠를 활용할 수도 있죠. 그게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참여하고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플레이를 받아들이기 쉽게 해 줄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단지 ‘상업적 가능성'이란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모든 게 상업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물론 양쪽을 모두 하는 게임을 만들 수도 있죠. 《엔들리스 포레스트》와 《8》처럼요.
ToT: [부끄럼]
ML: 말해놓고 보니 질문에 전혀 대답이 안 되었네요. 다시 질문해주세요…
ToT: 좋아요. “컴퓨터 게임 대부분의 강제적인 도전/보상 구조의 성공을 볼 때, 요구를 줄인 더 창조적인 형태의 놀이가 얼마나 실현 가능할 거라고 보시나요? 이런 유형의 게임을 할 사람이 있을까요?”
ML: 저는 더 창조적인 형태의 놀이를 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똑같은 수법에 새 자켓을 입혀놓은' 시리즈화에 얼마나 싫증을 내는지 보세요. 문제는 업계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느냐죠. 윌 라이트가 심시티 아이디어를 팔지 않고 자기 회사인 맥시스를 시작했을 때 게임 산업은 지금과 달랐습니다. 지금 보수적인 게이머가 많이 있긴 한데, 업계는 이 분야에서 가장 보수적인 플레이어입니다.
ToT: 경제 쪽을 무시하고 생각해볼 때, 디자이너들은 얼마나 멀리 나가야 할까요? 《괴혼》이 놀이와 즐거움에 완벽한 균형을 제시했나요? 아니면 전형적인 게임에서 더욱 더 탈피한 구조를 발전시켜야 할까요?
ML: 기술이 허락하는 한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디자인 이론가 에치오 만치니는 디자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물질적,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 사이의 교차점에 자리잡는다고 하죠. 합리적인 가격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놀라운 기술들이 있고, 대중은 수입 중 상당량을 그런 기술에 지출할 용의가 있어요. 그저 가능성 쪽에서 밀면 된다고 생각해요. 제 저술에서 상업용 컴퓨터 게임은 '상자 밖에서 놀기'가 힘들다고 자주 비탄했는데요. 디자이너들 역시 상자 밖에서 생각하고 디자인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더 다양한 놀이가 나타날 수 있겠죠. 더 나가서, 기술에 밝을 뿐 아니라 새로운 레벨과 패치, 모드를 만들어 디자이너와 생각을 나누려는 게이머들이 있으면, 디자이너들이 플레이어의 도움으로 생각을 더 멀리 뻗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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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2007년 6월과 7월에 미셸 사민이 이메일로 진행했다.
심즈 그림은 심즈 고문 실험 사이트에서 가져왔고, 중간에 삽입한 괴혼 그림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맛있게 생긴 괴혼 케이크 사진은 thesingingleaf의 플리커 사진첩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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