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7일

크로포드, “청중 엔지니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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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크로포드

저널 오브 컴퓨터 게임 디자인 6권(1992-1993) 수록

원제: Audience Engineering (원문보기 [영어])


 

“고객은 항상 옳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칭찬할 수 있는 정서이다. 호레이쇼 얼져가 말한 ‘잘 하면 잘 될 것이다’(do well by doing good) 라는 기업가적인 교훈과도 관련이 있다. 따르기엔 너무 높은 이상이지만, 우리는 우리 모두가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간다면 고객들이 감사하며 보상해줄 거라고 안다. 그렇다. 고객은 왕이다. 우리는 고객을 받들기 위해서 살아간다. 시장이 제공하는 이익을 받고자 우리는 겸손하게 자존심을 낮춘다. 무엇보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업이고,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충당하려면 우리 작품이 팔릴만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어리석은 건 아니다. 비즈니스의 잔인한 현실과 맞서는 것 뿐이다. 우리가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의 격언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는 게임 업계가 제품의 디자인 결정에 적용하는 오랜 지혜를 나타내 보여준다. 이 경우에 한해서, “오랜 지혜”은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방식은 지혜가 아니라 우매함이다.

고객은 뭐가 옳은 지 모른다

고객들이 뭘 원하는지 보자. 어떤 시장에서는 고객들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 프로그래머는 그의 요구사항에 적합한 고도의 정밀함을 갖춘 컴퓨터를 구매하려고 한다. 식당을 찾은 배고픈 고객은 별다른 고민 없이 메뉴에서 가장 끌리는 것을 고른다.

우리는 정보를 판다. 우리가 파는 정보는 특이한 종류다. 즐겁게 하는 정보. 그것이 우리를 다른 시장과 차별화한다. 실체가 있는 상품이라면 고객은 똑같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정보가 있는 것이라면 다른 것을 원한다. 내가 자동차를 산다고 하자.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고 좀 더 나은 자동차를 원한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차를 사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선택이 없다면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게임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밸런스 오브 파워”(Balance of Power)를 구매한 사람이 다시 그것을 구매하고 싶어할까? 나는 혼다 프렐루드를 세 번 구입했었다. 나는 스무 개의 칠레 치킨 샌드위치를 소비했다. 수십 벌의 리바이스 청바지를 샀다. 하지만 내 인생에 있어 나를 위해 똑같은 게임을 두 개나 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판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써의 정보가 지닌 기본적인 속성이다. 어떻게든 가치를 부여하려면 정보는 고객이 이미 가진 것과 달라야만 한다. 누구에게든 어떤 정보를 두 번 팔 수는 없다. 뭔가 새롭고 다른 것을 제공해야 한다.

여담: 후속작

자, 잠시 멈춰서 이 시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에 대답해야겠다. 후속작은 어떤가? 그 분야의 대가 “울티마” 시리즈를 보자. 아주 오래 전에 “아칼라베스”와 함께 소개되었던 개념을 바탕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게임들이 꾸준히 만들어졌다. 영화 산업이나 서적에서도 후속작을 많이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후속작은 일정한 맥락을 바탕으로 새로운 내용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자.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거의 가장 오랫동안 후속작을 내놓는 작품일 것이다. 우리 모두 제임스 본드 영화의 기본적인 매개변수를 알고 있다. 주인공 본드는 부드럽고 유쾌하며 침착하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할 범죄를 저지를 환상적인 계획을 가진 이국의 범죄자와 맞서게 된다. 본드는 아마 붙잡혀서는 그 주모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모자는 아주 이상한 방법을 궁리해 본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하지만 본드는 탈출해서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궁지를 벗어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명 이상의 지구 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성을 유혹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기본적인 매개변수를 안다.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모른다. 범죄자가 얼마나 거칠고 미치광이일 것인가? 그는 얼마나 환상적인 범죄를 계획하고 있는가? 이번에 본드가 잠자리를 함께 할 여성의 머리색/몸매/사이즈는 어떤가? 만약 내가 극장에 “골드 핑거”를 다시 내건다면 별로 많은 티켓을 팔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최신 제임스 본드 영화”를 제공한다면 많은 고객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업으로 돌아가서

그러니 후속작의 인기는 우리가 새롭고 색다른 정보를 판다는 주장을 뒤엎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청중이 어떻게 “새롭고 색다른 정보”라는 소원을 우리에게 전하는가? 실체가 있는 물건에 욕구를 표현하는 것은 쉽다. 나는 신선한 바나나를, 더 빠른 차를, 더 큰 텔레비전을 원한다. 하지만 어떻게 “다름”을 표현할 수 있는가? 내가 실체가 있는 물건을 위해 제공하는 피드백은 구조적(더 신선한, 더 빠른, 더 큰)이다. 하지만 정보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부정(내가 이미 가진 것이 아닌)이다. 내가 거기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수로 밝혀내겠는가? 따라서, 고객은 옳을 수 없다. 고객은 고객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

게임 업계는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실패했다. 대신 문제에 구조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 고객이 표현하는 모든 욕구에 대답하려 했다. 항상 정도의 문제로 접근한다. “더 신선한, 더 빠른, 더 큰” 대신에, “더 다양한 색, 더 많은 그래픽, 더 풍부한 사운드”다. 이건 1980년대에 아타리(Atari)가 펼쳤던 마케팅 슬로건인데, 12년이 지나서도 우리의 최우선 전략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

이 전략은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했다. 우리는 우리의 고객에게 오직 새롭고 색다른 정보만을 팔 수 있다. 이를 외면했던 우리는 허우적거렸다. 제품 관리자나 마케팅 사람들, 프로듀서들, 디자이너들, 회사의 임원들과 이야기했을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이들 모두가 방향 감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우리가 향하고 있는 지옥에 대해서 알지 못 했다.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은 단 두 가지이다. 성공적인 제품의 후속작, 그리고 혁신적인 신기술. 그러한 제품을 제공했을 때 퍼블리셔들은 그것을 엄청난 구원인양 꽉 쥐고 놓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 업계는 몇 인치 밖에 전진하지 못 했다. 걷기 전에 시험 삼아서 1인치씩 양 발을 옮겨본다. 그런 식으로 걷다가는 절대, 영원히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다.

창조적 접근

그 근본적인 실패는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우리가 고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방향이 잘못되었다. 제품 등록 카드나 마케팅 조사, 포커스 그룹이 전하는 불완전한 결과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고객에게 나아갈 미래를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없다. 그들도 그들이 뭘 원하는 지 모른다. 우리가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

이차선 도로

이 사실은 나를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었다. 우리 업계에서 의사결정의 흐름은 이차선 도로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장에서 의사결정의 흐름은 일방통행이다. 고객들은 자신들이 뭘 원하는지 결정하고 제작자들이 고객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분투한다. 그런 시장들에서 고객은 정말로 왕이다. 하지만 우리 산업에서는 고객이 스스로 뭘 원하는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통솔력을 가지고 그들의 피드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을 고객에게 제공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론에 다가갈 수 있다. 우리의 제품 구성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는 필요(need)가 아니라 욕망(desire)이다. 그러니 우리의 청중은 자신이 만족하는 것을 따라왔다가 간다. 우리는 우리 제품 구성이 끌어오는 사람들을 끌어와야 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내치더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청중을 조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우리 고객들과의 관계는 단순히 고객에 반응하기만 하는 대부분의 다른 산업들보다 훨씬 더 많은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고객들은 어떤 제품과 회사들이 성공할지 결정하고, 우리는 어떤 고객들을 청중으로 남게 할지 결정한다. 고객들은 나쁜 회사들을 업계에서 쫓아내고, 우리는 “부적절한” 고객들을 우리의 청중에서 제외한다.

청중 엔지니어링

이제 나는 단순한 제안을 할 것이다. 이 관계를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계획적으로 이용하자. 우리 청중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수년에 걸쳐 이동하고 진화해왔다. 이 현상을 계획을 수립할 때 고려해선 안 되는가? 청중의 구성에 영향을 주려는 계획적인 시도, 그러니까 청중 엔지니어링을 해서는 안 되는가?

그 제안이 다소 무리하게 보인다는 것을 안다. 우리 대부분은 한 제품에서 번 돈으로 다음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거대한 전략을 말하는 것이 신중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환상에 빠진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이 방향타를 잡지 못 한 다면, 배는 방향타가 멋대로 휘젓는 어딘가로 표류해갈 것이다.

이것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예를 지난 몇 년간 우리 업계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2년 전, 나는 이 저널에 그 과정을 잘 설명해주는 에세이 하나(“적이 된 게이머의 초상”)를 수록했다. 열렬한 게임 팬들은 퍼블리셔에 그 누구보다 길고 긴 피드백을 제공하고, 퍼블리셔는 그들의 충고에 귀 기울이며 초보자들을 바보로 만들어 시장에서 내쫓는 복잡한 게임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청중은 위축된다.

내가 그 글을 출판했을 때, 내 경고는 그 우울하고 암울한 운명처럼 무시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 때 예견했던 것 중 많은 것이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의 게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몇 년 전보다 더 복잡하다. 그리고 컴퓨터 게임 시장은 지난 2년간 확실히 줄어들었다. 1990년의 히트작들이 25만 장 이상 팔렸다면, 지난 12개월간 발매된 어떤 게임도 그 벽을 넘지 못 했다. 1990년에는 스무 개 이상의 게임들이 10만 장 이상 팔렸지만, 올해에는 그런 게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퍼블리셔들이 디스크 기반 게임 시장의 쇠락에 타격 받지 않을 만큼 다변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전망에 잘 귀 기울이지 않는다. 제품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카트리지 게임, 에듀테인먼트 제품, CD제품, 컴퓨터게임)을 본다면 업계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컴퓨터 게임만을 본다면, 전망은 어둡게 보인다.

디스크 기반 시장 쇠퇴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초보자들과 애호가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1년에 몇 번 정도만 컴퓨터 가게에 들려 선반을 둘러보고 게임을 선택해왔을 것이다. 그들 개개인을 보아서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우리의 판매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그룹이다.

그 고객들을 잃어버린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신이 벌인 일도 아니고, 높은 곳에서 전달된 피할 수 없는 숙명도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한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우리는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게임들,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게임들, 장황한 매뉴얼을 가진 게임들을 만들면서 그들을 쫓아내버렸다.

좋든 싫든, 우리는 청중 엔지니어링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단지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우리의 의도치 않은 청중 엔지니어링이 우리의 청중을 만들었다. 아마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만든 청중을 보며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욕구를 만족시키기 쉽게 잘 정립된 그룹이다. 업계에는 대중시장을 추구하는 것은 포기하고 우리가 이미 확립한 틈새 시장에 집중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잘못 걸어오긴 했어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나는 우리의 계획에 청중 엔지니어링을 포함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나는 게임의 잠재력이 그 직접적인 판매량만으로 측정될 수 없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간접적인 판매량도 함께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룸”(Loom)과 “문명”(Civilization)을 비교해보자. 우리 모두 “문명”이 “룸”보다 더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룸”을 플레이 해본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게임을 해보게 되었을까? ”문명”을 플레이 해본 사람들은 어떨까? 나는 “룸”의 간접적인 판매량이 “문명”보다 더 높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는 그것이 추론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직접적인 판매량은 손쉽게 추산할 수 있지만, 간접적인 판매량은 입증이 불가능하다. 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간접 판매량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다. 간접 판매량이 가져오는 현상은 거부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수학적으로 본다면, X 값을 측정할 수 없다고 해서 X = 0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모두 X > 0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판단력을 이용해 그 X를 어림잡아 보아야 한다.

내 말은 우리가 X의 어림값을 판매량 측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게임이 우리의 전반적인 경제적 생존력에 기여한 정도를 좀 더 현실적으로 측정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청중 엔지니어링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청중을 조직한다는 사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권은 그 조직을 신중하게 할 것인가, 생각 없이 할 것인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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